돌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승우.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표정이 복잡 미묘하다. 이곳은 돌탑을 구경 온 사람들과 돌탑에 빌기 위해 오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뉜 듯했다. 조용히 돌탑을 바라보는 승우 옆으로 단체 관광객들이 이 돌탑에 대해 아는 지식이 많은 양 가타부타 떠들어 댔고 그 말 중에서는 거센 태풍이 휩쓸고 갔어도 이 돌탑만큼은 쓰러지지 않았다고 한다며 놀라워했다. 돌탑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저 높이 올라간 돌만큼이나 굳건했다. 기이한 현상일까. 그도 그럴 것이 돌탑 바로 옆에는 지난 태풍으로 인해 쓰러진 나뭇가지가 그 현상의 미스터리함을 더했다. 승우는 돌연 생각에 잠겼다.
평소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살아온 승우였다.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 떠들어대는 귀신 이야기조차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눈 하나 깜박 않고 넘겨오던 그였다. 그럴 때면 친구들은 재미없는 녀석이라고 웬만한 과학자들도 너보다는 덜 이성적일 것이라며 치를 떨기도 했다.
아마 그의 어머니가 지극히 미신을 믿어서일지도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점쟁이를 찾았고 운세를 보러 다녔다. 그렇게 극성을 떨던 어머니가 차마 집안에 굿판을 벌일 수 없었던 것이 승우 때문이리라.
아들인 승우가 수능을 칠 때에도 사법고시 시험을 칠 때에도 어머니는 극성을 떨었다. 마음 깊이 기도를 드렸고 지금 승우가 서 있는 이곳, 마이산 돌탑을 찾았다.
돌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성적인 아들의 명석한 두뇌 때문이었을까 승우는 원하는 학교에 붙었고 사법고시도 한 번에 붙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쓰러지셨다.
‘그렇게 찾아다닌 점쟁이는 엄마가 쓰러지실 것을 알았을까. 알았으면 귀띔이라도 해줄 것이지. 그럼 그렇지. 그런 미신들 다 소용없으니까 그렇게 누누이 믿지 말라고 말했건만.
그렇게 돈 갖다 바치고 시간 갖다 바치면 뭐해 정작 엄마는 이렇게 쓰러져 있는데.
내 말 들리지 엄마? 엄마 이젠 눈 좀 떠봐. 아들 왔어.’
심장박동을 알리는 그래프는 전혀 미동도 없었다. 승우는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힘껏 잡으면 그래프가 조금은 더 힘차게 움직이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래프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선을 이루며 그래프를 그려나갔다. 엄마의 손을 잡고 있던 승우의 손에도 조금씩 힘이 빠졌다. 손을 잡고 있는지 손을 대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손에 힘이 빠졌다.
승우는 돌탑을 찾기 전에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실을 들렸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운세를 이야기하던 엄마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다. 얕은 숨을 몰아쉬며 아기같이 쌔액쌔액 거렸다. 곧 깨어나시겠지. 승우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이곳에 누워있고 엄마가 나를 지켜보는 입장이었다면 엄마는 어떻게 했을까. 의사의 말을 믿었을까 아니면 점쟁이 말을 믿었을까.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해도 점쟁이는 굿을 한번 한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고 엄마를 꾀겠지. 아니 엄마의 지갑을 꾈 것이다.
승우는 다시금 돌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전히 관광객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탑을 바라보았고 저마다 소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돌을 찾아다녔다. 승우도 그 무리에 묻어 매끄러운 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누군가가 올린 돌 위에 살포시 올려보았다.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리고는 여전히 미신은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돌탑이 거센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았다니까. 엄마도 저 거센 돌탑처럼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진 않을 것임을 믿었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를 되찾을 것임을.
승우의 돌이 오르기 전 바로 밑에 있던 누군가가 올린 돌, 그것이 엄마가 그 전에 올린 돌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 계획된 마지막 여행이었다. 여섯 살짜리 딸아이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지 못해서인지 김밥을 싸 가자고 성화였다. 잠이 많아 아침마다 깨워서 유치원에 보내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아이가 나보다도 일찍 일어나 고사리손으로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남편은 아직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딸아이가 아빠를 깨우겠다며 쪼르르 건넛방으로 달려갔다.
“마지막으로 민주가 가고 싶다고 했던 섬이나 다녀오자. 텔레비전에서 본 이후로 벌써 열 번도 넘게 조른 것 같아.”
나는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꾹꾹 참으며 말했다. 사소한 일로 시작된 다툼이 어느새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그게 무엇 때문이었더라, 아마 설거지나 빨래 같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던 것 같다. 각방을 쓰게 된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하루 종일 말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은 날도 허다했다. 다른 건 다 괜찮았다. 우리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점점 더 소극적인 성격이 되어가는 민주를 두고 보기가 힘들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는지, 먼저 이혼을 제의해 왔다. 이상하게도 그때 내게는 딱히 이혼을 거절할만한 구실도,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
섬에 다녀온 뒤에 이혼 서류 같은 것들을 정리하고, 민주에게도 엄마 아빠의 결정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은,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마지막 여행이 될 터였다.
서울에서는 두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장고항에서 고작 십 분.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섬이라기에 민주가 멀미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장고항에서 섬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국화도. 생각할수록 기억하기도 쉽고 참 예쁜 이름이었다. 고작 여섯 살밖에 안 된 민주도 텔레비전에서 한 번 본 섬 이름을 기억하고 한 달이 넘게 국화섬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을 정도니까 말이다. 국화도는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송이의 국화처럼 작았다. 민주가 옷소매를 잡고 늘어지며 외쳤다.
“엄마, 나 토끼섬!”
토끼섬이 뭔가 했더니 도지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남편이 민주를 안아 올려 목마를 태워 주었다. 민주는 신이 나서 토끼섬, 토끼섬 하고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른다. 국화섬은 세 개의 섬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세 개 중 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섬을 이르는 말이기도 한다고 했다. 위성을 거느린 행성처럼, 썰물 때에는 도지섬과 매박섬으로 가는 길이 모두 열린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도지섬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아주머니 한 분이 도지섬에 가는 것을 만류하신 것이다.
“지금 가면 안 될 텐데. 지금 밀물이라 들어가면 못 나올 수도 있어요. 잠깐 물놀이하면서 썰물 때까지 기다려 봐요.”
밀물이었다. 민주가 토끼섬 못 가냐며 울먹이다가, 끝내는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도 나도 당황하여 일단 민주를 달랬다.
“민주야, 아주머니 말씀대로 좀 이따 썰물 때 가면 되잖아. 응?”
민주는 밀물이 싫다며 막무가내였다.
울다 지친 민주를 남편이 안아 재우는 동안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을 나왔다. 나는 그때야 안내문을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도지섬은 지대가 높아 밀물 때에만 길이 끊기고, 매박섬은 지대가 낮아 썰물에만 길이 열린다고 한다. 남편과 나, 그리고 민주도 밀려오는 파도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한다. 나는 도지섬이 될까, 매박섬이 될까. 나는 왈칵 울음이 쏟아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민주는 국화섬처럼, 도지섬과도 매박섬과도 매번 이별을 되풀이하며 살게 될 것이다.
뒤따라 나온 줄도 몰랐던 남편이 달려와 나를 일으켜주었다. 왜 우느냐고 묻는 남편에게 나는 조금 전의 민주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보, 밀물이야.”
해운대에 내려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날이 갈수록 날짜 세는 데에 무심해지고 있으니, 오늘 날짜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일이 다반사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부정적인 일이 아니다. 내가 쓰는 시간을, 내게 남겨진 시간을 세는 것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꽤 인지도가 있다. 추억을 남기려 내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는 꼭 배경으로 노을 진 바다를 함께 그려준다. 그것도 붉은 빛이 아니라 노란 빛깔로 노을 져 가는 바다를 말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단순한 서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여기에는 나만 알고 있는 사연이 있다.
무작정 그림을 그리겠다고 해운대로 내려왔다. 집안의 반대가 심하여, 어렵게 들어간 미술 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하고 경영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집을 떠나던 날, 어머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꼭 안아주셨다.
“넌 어디 가서든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나를 더 붙잡지 못하고 이 말만을 전하실 때의 그 심정이 어떠했는지, 나는 아직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꼭 성공하겠다는 막연한 한 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집을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부산 쪽에 살고 있는 친구가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캐리커처를 그려 주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고작 몇 시간 뒤에 해운대에 닿을 수 있었으나, 해변에서 캐리커처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내게 쉬이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무턱대고 사람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아쿠아리움 앞에 앉아 자리를 폈다가 싸움이 붙을 뻔한 적도 있었다.
어느 흐린 날, 백사장 끝까지 밀려난 나는 그 날의 장사를 포기하고 해변을 따라 걸었다. 집을 떠나면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제일 먼저 그리워진다더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 분명 비어있는 내 방에 들어가 내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시고 계실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꽤 멀리까지 와 버렸다. 친구들과 몇 번 놀러 온 적이 있어 해운대 번화가의 지리는 꽤 잘 아는 편이었지만, 해수욕장을 벗어난 적은 없었다. 작은 목조계단이 보이고, 어느 새 동백섬 입구를 마주하게 된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동백섬으로 들어갔다.
앞길이 깜깜할 때 바다를 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망망대해 앞에 서 있으면 내 자신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절로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순수 미술을 전공하겠다는 사람이 이만 원을 받고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일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기분만 우울해지는 것을 괜히 올라왔다고 생각하며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던 그 때, 내 앞에 인어공주가 나타났다.
바위 위에 올라앉은 그녀는 아름답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대신,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발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손에는 구슬이 하나 들려 있고, 옷자락 아래로는 물고기의 꼬리가 숨겨져 있다. 무슨 연유인가 하니, 이 공주의 외할머니의 나라는 바다 아래의 수정국이며, 어머니의 나라는 바다 건너 나란다국이라 하였다. 공주가 이 동백섬에 시집을 와서 왕비로 살다가 두 나라를 몹시 그리워 하니, 그녀가 가진 황옥에 달 밝은 밤이면 두 나라가 비쳤다고 한다.
나는 청동상으로 만들어진 이 인어공주의 모습에서 기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때마침 해가 저물기 시작했는데, 흐린 날의 일몰은 새빨간 홍옥이 아닌 노오란 황옥 빛깔이었고, 그 공주의 이름도 모국의 이름을 따서 황옥이라 하였다. 황옥 공주의 쓸쓸한 등 위로 노랗게 타는 노을빛이 내리니, 나는 그때야 이 바다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운대 앞바다가 아닌, 고향을 그리워하는 황옥 공주가 앉아 있는 동백섬 앞바다를 말이다.
집을 떠난 지 한 달. 나는 그날에서야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물이 핑 돌았지만, 쉽게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화가로서 당당하게 내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나는 그림마다 노랗게 타는 노을을 그려 넣었다.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펴자 다른 그림쟁이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하루하루, 느리지만 차근차근 내 자리를 잡아 지금에 이르렀다.
인적이 드물어지는 시간이면, 가끔 황옥 공주 옆에 가 앉아 함께 황옥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황옥에는 가끔 우리 집이 비치곤 한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그녀에게, 이제는 내가 되려 위로를 건넨다. 돌아갈 곳이, 그리워 할 곳이 있기에 바다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이야, 서울은 역시 죽이네. 사람들 때깔부터가 다르다. 우리 동네랑은 비교도 안 된다.”
서울로 갓 상경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끼는 서울의 첫인상은 그랬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고 고층 건물들은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아찔한 높이를 자랑했다. 고층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저기를 올라가려면 며칠 전에 올라가야 하나? 라는 촌티 팍팍 나는 생각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 당시에는 엘리베이터라는 것이 생소할 시기였으니 그럴 만도했다.
내가 서울이라는 곳 그것도 영등포구라는 이 네 글자를 기억하는 건 단 하나였다. 다름 아닌 ‘라디오’ 그때의 청춘이라면 누구나 문세오빠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매일 같은 시간이면 지지직거리며 주파수를 잡았고 스탠딩 불빛 하나만 켜놓은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매일 밤 10시 5분부터 밤 12시까지 문세오빠의 달콤한 목소리와 각각의 사연들 그리고 언제 나올지 모르는 신청곡을 기다리는 재미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가사를 받아 적느라 팔이 아프도록 글씨를 끼적인 적도 있고 문세오빠가 읽어주는 사연에 눈물콧물을 쏟기도 했다.
라디오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항상 라디오에 신청곡이나 사연을 보내라며 말하던 곳이 영등포구 여의도동 사서함…… 이렇게 시작했다. 지방에 사는 나로서는 서울 하면 내가 늘 들어오던 영등포구 여의도동밖에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그렇게 내게 영등포구 여의도동은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그런 공간이었다.
그렇게 올라온 서울은 역시나 특별했다. 사실 정신없는 도로와 사람들 때문에 별 다를 것 없는 공간이 더욱 특별해 보인 것일 수도 있다.
“야야! 저 봐라. 저기 진짜 높은 건물 있다. 저게 다 몇 층일까?”
“야, 니 저거 모르나? 63빌딩!! 63빌딩이니까 63층이지.”
“니는 어떻게 알았는데? 그나저나 63층? 이야. 저기 올라가면 서울 시내 다 보이겠다. 그렇지?”
“올라가볼래? 여기까지 왔는데 63빌딩도 안 올라가보면 사람들이 욕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긴 시간을 보낸 채 도착한 곳은 63빌딩의 전망대였다.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꿈에 그리던 서울 길. 그리고 그 속에 속해있는 나 자신이 신기한 순간이었다. 서울이라는 단어가 마치 다른 나라 같은 느낌이었는데, 내심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야! 저기 저 방송국! 저기에서 문세오빠 라디오 하잖아. 저기서 한참 있다 보면 오빠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바보야, 지금 아직 오후 4시도 안됐는데 무슨, 오빠 라디오 밤에 하는 거 몰라?”
“아, 그렇지. 그럼 우리 오늘 우리 여기 왔었다고 라디오에 사연 보내볼까? 그럼 당첨돼서 문세오빠가 우리 이름도 불러줄걸?”
63빌딩에서 내려와 한참을 문방구를 찾아 헤맸다. 우리 동네는 그냥 마을 어귀에 자그마한 문방구가 하나쯤은 있었는데 여기는 그 흔한 문방구도 잘 보이지 않았다. 무슨 서울이 문방구 하나 없나 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문방구를 물어보니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 도착하니 문구와 여자아들이 좋아할 만한 머리핀, 작은 장난감까지 함께 팔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져 한참을 구경하다 예쁜 엽서 하나를 골라왔다.
투. 문세오빠.
안녕하세요? 문세오빠. 이렇게 시작한 글에 우리는 참 손글씨로 어여쁘게 엽서를 꾸몄다. 긴장감에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 글이 영등포구 여의도동으로 드디어 실려 가는 구나 생각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두 손을 모아 엽서를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었다. 언제 방송이 될지도 모른 채 혹여 채택이 안 되면 어쩌나 노심초사 걱정도 되었다.
앗, 10시다! 별이 빛나는 밤에 할 시간이야.
별이 빛나는 밤에. 문세오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에 꽃받침을 하고 이불속에 쏙 들어가 라디오를 한 참 듣는데 익숙한 이름과 글귀가 흘러나왔다.
투 문세오빠.
안녕하세요? 문세오빠.
그렇게 우리가 보낸 사연이 채택되어 라디오를 타고 흘렀다.
처음 영등포구를 찾던 날, 63빌딩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본 것, 라디오에 사연을 쓰게 된 이야기까지 라디오는 참 신기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타고 흘렀다.
라디오에 온 감성을 쏟았고 학창시절이 라디오로 가득 차 있던 시기. 그 속에는 가 본적이 있어도 가보고 싶은 영등포구 여의도동이 있다.
오늘은 어떤 사연이 이 주소로 흐르게 될까.
편안한 차림을 한 청년들이 모여 있고 그 속에는 유난히 흰 피부를 가진 민규가 눈에 띈다. 소풍이라도 가듯이 청년들은 삼삼오오 한껏 들뜬 표정을 하고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농활을 가는 길이다. 대학졸업을 위해 더 자세하게는 학점을 위해 떠나는 농촌봉사활동이다.
민규에게 시골이라는 공간은 이국의 어떤 사원만큼이나 낯선 공간이었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댁 모두 서울이었다. 그래도 민규는 할머니댁 간다는 말을 시골에 간다는 표현으로 쓰곤 했다. 다른 애들처럼.
도시에서만 자란, 민규와 친구들에게 농활은 그저 졸업장을 받기 위한 수단이었고 친구들과 떠나는 2박 3일 MT쯤으로 여겼다. 그저 적당히 물이나 주고 돌멩이나 고르다 오면 그뿐, 맑은 공기 마시며 힐링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버스에 오른 민규였다.
뻥 뚫린 고속도로에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원활한 소통을 보였다. 그래서일까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김제. 내리자마자 코끝에 불어오는 풀냄새와 꽃향기가 느껴졌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가을에 황금빛을 띠며 자랄 벼를 위해 논에 물을 대고 잡초들을 뽑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농활이었다. 쪼그려 앉아 몇 시간씩 고된 농사일을 하다 보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일은 해도 해도 끝날 줄을 몰랐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들던 청년들은 점점 말수가 줄었고 긴 한숨 소리만 정적을 메웠다.
때마침 반가운 새참시간. 학생들은 환호했고 민규도 뻣뻣해진 허리를 모처럼 폈다. 우두둑 소리가 났다. 새참은 파전에 막걸리였다. 민규가 무리의 끄트머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파전을 먹었고 이제야 시골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중간을 만난 듯했다.
“힘들지?”
진 초록색 모자를 쓰신 할아버지께서 민규 옆자리에 앉으셨다. 아마 이장님 댁 할아버지이신 듯했다.
“아닙니다. 허허. 저희는 그래 봐야 이틀인데요. 뭐.”
민규는 저도 모르게 이틀이라는 시간을 단정 지었다. 이틀, 그 이상은 봉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통보처럼 들리기도 했다.
“젊은이들은 모를 거야. 쌀이 어떻게 나오는지. 교과서에서 배웠을지 모르겠지만…. 쌀 한 톨 귀한 줄 알아야 해. 요즘은 산업이다 공업이다 성공의 잣대가 최첨단으로 흐르고 있지만 그 뿌리는 농사다 이거지. 허허”
할아버지는 젊은이들을 앉혀놓고 괜한 잔소리가 아닌가 싶어 끝에 웃음을 흘렸다.
쌀이 어떻게 출하되는지는 민규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할아버지 말대로 민규는 교과서에서 모내기부터 추수까지 나름대로 자세하게 쓰여 있었으니까.
그런데 교과서에는 벼가 쌀알이 되기까지 농민들의 이야기는 한 글자도 언급되지 않았음을 안다.
“우리나라가 농경사회가 아니겠어. 한국인은 밥심으로 사는 거지. 밥을 먹어야 힘이 나는 거야. 알지? 옛날에는 그저 한해 농사만 잘되게 해달라고 빌었으니까. 바랄 것이 그뿐이었던 시절이 다 있었으니까.”
할아버지의 말씀에는 앞뒤 문맥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으나 이해를 못 할 만큼은 아니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해가 지니 금방 어두컴컴해졌다. 시골이라 그런지 8시만 되어도 새벽녘처럼 깜깜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만이 환한 빛을 비출 뿐 서울에서 보던 화려한 불빛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늘은 잠이 잘 올 것만 같았다. 피곤해서 그럴 것이다.
이틀뿐이라던 시간은 흘렀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른 민규는 약간은 검게 그을었다. 건강해 보였다. 고속도로는 여전히 소통이 원활했다.
서울은 여전히 높고 화려한 건물들로 가득했고 번쩍이는 네온사인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8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민규는 갑자기 어지러웠다. 잠시 찾아온 현기증 정도로 여겼다.
그곳에서 복숭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퍽 힘든 일이었다. 도로변에는 복숭아밭이 있고, 봄이면 도화잎이 날렸으며, 여름이면 복숭아 축제가 열렸다. 그리고 우리는 폐교 운동장을 빌어 열리는 그 축제에서 맛볼 수 있는 복숭아 막걸리를 사다가 자취방에 쟁여두곤 했다. 복가난한 대학생들이었던 우리에게는 딱 그 만큼이 행복이었다. 복숭아향이나 복숭아 빛깔, 복숭아 맛까지.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복숭아에 빗대어 표현했으며, 특히 나는 복숭아를 닮은 너의 발그레한 두 뺨을 좋아했었다.
휘어진 가지 끝은 종종 울타리를 넘어왔다. 한밤중이면 우리는 술기운을 빌어, 그리고 세상 모든 대학생의 권리라는 패기를 빌어 복숭아 서리를 감행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가 서리한 복숭아들은 항상 시거나 떫었다. 내가 복숭아를 훔치는 이유는 혹시나 주인이 나타날까봐 잘 익은 복숭아처럼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네가 재미있었기 때문이었지만, 너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 말이 맞지? 울타리를 넘어 오게 놔둔 것들은 맛없는 복숭아라니까.”
“아무렴 어때.”
나는 정말로,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었지만 너는 금방 토라진 얼굴로 길가에 주저앉으며 맛없는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문다. 다리를 까딱이며 맛없고, 조그맣고, 게다가 못생기기까지 한 복숭아를 오래오래, 아주 조금씩 먹어치웠다. 나는 그동안 모난 성격에, 키가 작고, 결코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네 옆모습을 조금씩 훔쳐보고 있었다. 딱 이 부분에서부터 나는 조금씩 혼란스러워진다. 너는 긴 머리를 하고 있던가, 안경을 쓰고 있었던가. 너는 나보다 어렸던가, 아니면 동갑내기였던가. 마침내 네가 복숭아씨를 퉤, 하고 뱉어냈을 때, 낡은 슬리퍼를 신고 있던 너의 복사뼈 언저리가 마치 곧 싹이 돋을 것처럼 신비롭게 보였던 것만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어느 날 너는 갑작스레 사라져버렸다. 사고가 났다고 했던가, 아니면 병에 걸렸다고 했던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휴학을 했다고 하던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거짓말처럼 덜 신경질적이며, 키가 더 크고, 더 예쁘장한 아이와 함께 아주 가끔씩 복숭아를 훔쳐 먹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졸업을 맞이한 나는 자연스레 그곳을 떠났다. 몇 년 동안 머무르던 자취방을 정리하고, 기념처럼 가지고 있던 빈 막걸리 병들을 내다 버렸으며, 백 리터짜리 쓰레기봉투 가득 담겨있던 것 중에는 분명 너와의 추억이 서린 물건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렴 어때. 짐정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복숭아, 조치원 복숭아요!”
귀갓길에 트럭으로 복숭아를 내다 파는 노점 상인의 고함소리를 듣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무려 2만원 어치의 복숭아를 사 들고 돌아왔으며, 복숭아를 다 먹어치운 주말 즈음에는 조치원으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타고 있었다. 복숭아가 생각보다 맛있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복숭아씨들을 곧바로 내다버리지 않고 싱크대 한 구석에 모아두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나는 그동안 두 번의 연애를 더 했고, 한 번의 이혼을 감행했으며, 첫 번째 이직을 앞두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지쳐 있었고, 다시 말하자면 네가 보고 싶었다. 물론 대학교 캠퍼스에 간다 한들 그곳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저녁 즈음에야 학교 정문 앞에 하차했고, 절반 정도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후배들을 불러내어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셨고, 급기야는 몇 년 새 더 견고해진 울타리의 귀퉁이를 부수고 복숭아밭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학창시절에 단 한 번도 검거되지 않았던 복숭아서리범이 지금 밭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유다.
‘알 만한 사람이 도대체 왜!’하는 성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쩌면 그곳에서 자라는 복숭아나무들 중, 너의 복사뼈에서 자란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알 만한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도 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나는 가끔 사람들의 발목 언저리를 내려다보곤 한다. 혹시나 낡은 슬리퍼 위로 드러났던 너의 바싹 마른 복사뼈, 금방이라도 싹이 돋아오를 것 같은 어리고 단단한, 못생긴 복사뼈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항상, 굽 높은 하이힐 위로 자리한 동그란 뼈들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모두 매끈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운 모양이다. 나는 가끔씩 그것이 서럽다.
휴학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새내기로 맞았던 대학의 첫 봄은 너무 빨리 지나가버렸다. 남들도 다 겪는다는 미완의 러브스토리도 두어 개 생겼고, 아주 많은 사람들과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벚꽃 날리는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를 하던 꿈같은 지난 봄. 올해도 캠퍼스에서 봄을 맞을 수 있었는데, 연년생인 동생이 사립 명문에 턱걸이로 합격하며 나는 휴학을 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동생의 학비를 위해 내 학업을 잠시 접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카페에서 시작한 파트타임의 아르바이트는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흰색과 푸른색으로 꾸며진 심플한 내부에 하얀 의자들이 놓인 카페는 내 취향에 꼭 맞는 곳이었고, 사장님께 라떼 아트를 배우는 재미도 쏠쏠했다. 직장인들이며 대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점심시간 대를 제외하고는 손님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 별다른 사건 사고도 없었다.
문제는 이 사건사고가 없는 점이었다. 스물한 살이 맞는 봄 치고는 너무도 단조로운 이 봄. 동생의 SNS 페이지에 올라오는 대학 생활의 단면들을 감상하며, 왠지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여기에서 샷을 내리고 휘핑크림을 얹고 있고, 동생은 웃고 떠들고 공부하고 논다. 등록금 때문에 빚을 낼 수도, 갓 대학에 합격한 동생을 휴학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울한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정오 즈음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이어지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여행을 가기도 애매했고,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는 시간이 맞지를 않았다.
작년 12월에 1학년의 두 번째 학기를 종강한 이후로 카페와 집만을 오가던 내가, 갑자기 카페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린 것은 순전히 기분 전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날도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계양역에서 내려 계양대교 위를 건너가는데, 기차 한 대가 다리 밑을 지나갔다. 갑작스런 소음에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았는데, 눈을 떠 보니 아라뱃길 위로 지나는 유람선이 보였다.
평소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아라뱃길이 그날따라 왜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을까. 계양대교를 따라 아라뱃길 위를 건넌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귤현타워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봄꽃이 꽃망울을 틔워내는 시기였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봄바람에 섞여 온 아련한 꽃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그러고 보니 봄이 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꽃구경 한 번 하지 못했다. 시간이 없어 못했다기보다는, 도저히 꽃구경을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삼십 여 분을 걸었을까, 저 멀리 아라폭포가 보였다. 친구들한테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인공 폭포라고 해서 공원이나 캠퍼스에 조성되어 있는 작은 폭포를 상상했었는데, 아라폭포는 생각보다 꽤 컸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아라폭포 위로 올라 가 볼 수 있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왜 떨어지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폭포 안쪽에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옛날이야기 속의 신선이라도 된 것 같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폭포 안으로 들어갔다. 물줄기에 가려져 바깥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폭포 안에 쪼그려 앉아 머리 위에서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아래로 흐른 물은 다시 위로 올라갈 것이고, 또다시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는, 또 위로 올라갈 것이다. 하루가 지나듯, 한 달이 지나듯. 그리고 일 년이 지나듯 말이다.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사장님의 부재중 전화가 열통이 넘게 찍혀 있었다.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문자와 함께. 그리고 동생이 보낸 메시지가 와 있다. 메시지를 읽기 전에 나는 폭포를 나와 내려가는 계단에 앉았다. 시원한 물소리가 귀를 때렸다. 물줄기를 따라 봄이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 남편이 수상하다. 대중가요에서였나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더니 20여년을 가까이 살 맞대고 살았는데 의심의 불씨는 생각보다 빠르게 번져나갔다. 남편은 오로지 한 길밖에 모르고 살았다. 가정과 직장. 성실하나로 친정 부모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뚝심 있게 밀어부처 결혼까지 골인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요즘의 남편은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얼마 전 만난 고등학교 동창애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았기 때문이다.
“얘, 남자는 다 똑같더라. 우리 남편은 아니겠지. 우리 애 아빠는 그럴 리가 없어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딴 주머니 차고 다니는 게 남자라니까. 글쎄 세훈이 엄마 알지? 그 집도 이번에 이혼한다고 난리잖아.”
“어머, 왜?”
“왜긴, 여태 뭐 들었니? 딴 주머니 찼다니까. 글쎄 뭐라더라? 등산모임에서 둘이 눈이 맞았다나? 아무튼 뒤돌아서면 딴 생각하는 동물이 남자라는 동물이라더니. 세훈이 아빠 병수발 다 받아낸 게 세훈이 엄마인데 건강 생각한다면서 다닌 등산모임에서 바람이 날 줄 누가 알았겠니?”
“어머, 어머. 세훈이 엄마 어떻게 하니.”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위자료나 왕창 뜯어내고 갈라서는 거지. 간통죄로 안 처넣은 게 다행이라나 뭐라나.”
동창애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언행이 점점 거침없었다. 동창애의 언행처럼 나의 의심도 거침이 없었다. 남편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둥, 셔츠 옷깃을 살피는 등의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던 행동들을 내가 하고 있었다. 남편의 휴대전화에는 모르는 번호들이 적혀있었고 퇴근하면 바로 퇴근하던 남편은 요즘 새벽에나 들어왔다. 어딜 다녀오는 것이냐고 해도 답이 없었고 술을 마신 것 같지 않은 것이 회식도 아닌듯했다. 자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니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슬쩍 거실에 나와 서 있는데 남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때다 싶어 문자를 열어보니 오늘도 수고 많았다고 집 앞까지 데려다 줘서 고맙다는 등의 문자가 와있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음에 더 서글퍼졌다.
날이 밝았다. 새하얗게 밤을 지새우니 두 눈이 퀭했다. 어쩐지 잠을 한 숨도 못잔 나보다 남편의 얼굴이 더 퀭해보였다. 속으로는 두 집 살림 하려니 힘들기도 하겠지라며 비꼬았으나 아직은 내색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렇다 할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남편이 씻으러 들어갔을 때 어제 밤에 문자를 보낸 사람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어떤 여편네가 받겠지라는 생각을 했건만 멀쩡한 남정네가 전화를 받았다.
“저, 혹시 김영훈씨 아세요?”
“네? 김영훈이요? 누구시죠? 전 그런사람 모르는데.”
“네? 어제 김영훈씨한테 수고 많았고 집 앞까지 데려다 줘서 고맙다고 문자 보내시지 않으셨어요?”
“아~ 대리기사요?”
전화를 받은 남자의 입에서는 대뜸 남편을 대리기사라고 불렀다. 큰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멀쩡히 직장 잘 다니는 남편이 왜 야간 대리운전을 뛰고 있는가. 왜 나에게는 일언반구 아무런 말도 없이 투잡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씻고 나온 남편이 채 옷을 다 꺼내 입기도 전에 따져물었다.
“당신 뭐야? 당신 밤에 대리기사 뛰어? 도대체 왜? 당신이 왜!”
“당신 내 휴대전화 뒤져봤어?”
“지금 그게 문제야? 왜 대리기사를 나한테 아무런 말도 없이 하고 있냐고 왜!”
나는 남편에게 울부짖으며 악을 썼다. 그간 남편을 의심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남편이 왜 힘든 시간을 홀로 보내게 내버려두었나 하는 자책감이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만 한 사정이 있었으니까.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곧 그만 둘 거야.”
남편은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고 자리를 회피했다. 하루종일 넋이 나가 멍청하게 소파에 앉아있는데 친정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얘, 나다. 김서방한테 고맙고 미안해서 어쩌니. 내가 손 벌릴 곳이 없어서 너네한테까지 손을 다 벌리고. 김서방 덕분에 다행히 급한 불을 껐다고 전해줘. 너도 마음고생 많았지? 조만간 집으로 와. 맛있는 저녁 해 줄 테니까.”
“엄마,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이야기 해봐.”
“어머, 너 몰랐니? 내가 얼마 전에 급한 목돈이 좀 필요해서 전화했는데 김서방이 받더라고, 그래서 너랑 잘 상의해서 돈 좀 구할 수 있겠냐고 했지. 그랬는데 넌 모르고 있었니?”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괜히 친정 부모님 걱정할까봐 내 통장 하나 건드리지 않고 혼자 그 목돈을 구하려 대리운전까지 했던 거다.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 남편은.
자정이 넘어서야 남편은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들어왔다. 나는 말없이 남편을 꼭 안았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런 내게 남편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이 정도도 못하면 어디 쓰겠냐고 한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나는 남편과 다시 하나가 되어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