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햄버거, 치킨 이런 거 자극적이고 식욕당기지. 거기에 적당한 알코올까지 더해지면 더 좋고.” 남자는 비꼬듯 이야기한다. 남자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내뱉은 말이었다.
아내는 그렇게 이야기 하지 말라며 노여워했다.
“남의 새끼는 칼로리에 온갖 영양 다 계산해가면서 먹이고 정작 내 새끼는 피자, 햄버거, 자장면 이런 거나 먹이고. 이게 말이되? 어?”
남편은 그동안 꾹꾹 눌러 담은 분노를 아내의 얼굴을 향해 쏟아 붓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간 지나온 일들을 단편적으로 본다면 남편이 던진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여자와 남자는 맞벌이 부부다. 남편은 대학병원 의사로 늘 병원 아니면 서제에 있었고 수술이 있을 때면 특히 더 예민하게 굴었다. 수술이 있고 늘 환자를 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누구보다 심할 것이라는 걸 아는 아내였기에 아내도 그동안 남편에게 잔소리 한번 심하게 하지 않았다.
아내는 학교에서 아이들 영양식단을 책임지는 영양사로 근무하고 있다. 아내는 누구보다 체계적이고 영양이 가득한 음식플랜을 짰다. 아내가 짠 음식대로 조리되어 나오는 음식들을 학생들은 남김없이 먹었다. 키가 크고 뼈가 튼튼해질 수 있는 친환경 유기농 영양만점 식단이었기에.
끝내 아내는 눈물을 보였다. 남편은 아내가 울고 있는 줄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아내를 달래줄 마음이 당시에는 조금도 들지 않아서 일 것이다.
식탁에는 이미 시킨 지 오래되어 퉁퉁 불어터진 자장면이 놓여있었고 자장면을 사이에 두고 남편과 아내는 식탁의 각각 모서리에서 뾰족한 모서리보다 더 뾰족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몇 달 전부터 학교급식의 안전과 영양실태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면서부터 아내는 더욱 꼼꼼하게 영양식단을 짜야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신경을 덜 쓰기 시작했고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집에 갈 때 뭐 사갈까? 라고 한 말이 시작이었다. 그러면서 의례적으로 저녁은 할머니한테 먹고 싶은 거 시켜달라고 하라고 말하던 아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전히 아내는 훌쩍였고 자장면 그릇을 가지러 온 배달부의 초인종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남편은 진료일정을 미루고 아이와 함께 여행을 다녀오자고 말했다. 그러니 아내에게도 학교 일정을 조율하라고 말했다. 아내도 알겠다고 수긍했다.
그렇게 떠난 곳은 완주. 완주에 도착하니 와일드 푸드 체험이라는 것이 진행되고 있었다. 모처럼의 여행이라 그런지 아이는 신이 났고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아 끓여 먹어보기도 하고 잠자리채로 곤충들을 채집하고 튀겨먹어 보기도 하며 모처럼 가족 같은 분위기를 냈다.
아내는 아이와 남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 저녁상을 준비했다. 남편이 잡아온 물고기에 소면을 넣어 끓인 철렵국을 만들기로 했다.
‘아!’ 외마디 비명이 차마 목구멍으로 나오지 못하고 턱밑에서 머물렀다. 다행히 뜨거운 뚝배기 그릇을 들고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가벼운 국자가 아내의 손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아내는 얼마 전 손목이 시큰거리며 가끔 끊어질 듯한 고통을 호소하며 정형외과를 찾은 적이 있다. 의사는 직업으로 인해 온 질병으로 진단을 했고 아내는 며칠 째 음식을 하는 것도 무거운 그릇을 드는 것도 벅차했었다.
남자는 떨어진 국자를 집어 들었다. 남자는 순간 의사의 직감이었는지 아내에 대한 마음이었는지 아내의 손목에 이상이 있음을 감지했다.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어. 의사 남편 두고도 써먹지도 못하냐, 바보같이.
내일 우리 병원에 와, 다시 검사받자.
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국자는 내게 줘. 철렵국은 내가 끓이는 게 훨씬 맛있다고.”
“이렇게 나오니까 좋다. 공기도 좋고 이곳에서 나는 음식들로 바로 요리하고. 영양이고 식단이고 따로 짤 필요가 없네. 여기 내려와서 살까?” 아내는 웃으며 말한다.
산은 그저 산일뿐이야. 어떤 의미를 갖다 붙인다고 해도 산이라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몰라? 이런 논리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결혼을 약속한 둘이 유일하게 말다툼이 시작하는 곳 바로 산이다. 남자는 산이 좋았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모든 것이 적당했으면 하는 여자의 바람이 그리 욕심인 걸까? 여자는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였으나 남자의 산사랑 만큼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악몽 같던 첫 데이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둘은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둘이 소개팅을 하던 날 여자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질문을 했다.
“취미가 뭐예요?”
“등산이요.”
남자의 한껏 격양된 목소리는 무심코 던진 돌에 반응하는 개구리처럼 번뜩였다. 등산이라는 단어는 무미건조하고 일반적인 취미 중 하나였으므로 특별할 것 없다고 여겨지기 쉬웠으나 남자의 등산사랑은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었다.
여자는 어쩐지 남자의 체구가 더 탄탄해보였고 요즘 트렌드에 맞게 자기관리 하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등산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 같다고 말하겠지만 그때의 남자는 듬직하고 씩씩해보였다.
“그럼, 막 높고 험한 산들도 잘 타시겠네요?”
“그럼요, 언제 한 번 같이 등산 가실래요?”
그렇게 둘의 첫 데이트는 등산이었다. 보통 연인들처럼 아기자기한 카페에서 자기 한입 나 한입을 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손을 잡아주면서 그렇게 도란도란 구경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계절을 생각하지 못했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산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은 멋있었으나 그 현장에서는 발이 푹푹 빠졌으며 몇 걸음 안가 금세 체력이 바닥이 나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등산이라고는 동네 언덕배기 정도 오르락내리락 한 것이 전부였던 여자에게 친하지도 않은 사람과 험준한 산행을 한다는 것은 더욱 체력소모가 큰 일이었다. 가족과 함께였다면 벌써 징징거리며 내려가겠다고 떼를 썼겠지만 명색이 첫 데이트에서 내려가겠다고 신경질을 부리는 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저렇게 황홀한 표정으로 산을 오르는 남자에게.
어느새 여자는 조금씩 뒤쳐졌고 조금 쉬었다 가자는 말도 잦아졌다. 여자는 내색하고 싶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표정에서 지치고 짜증이 섞인 표정이 새어나왔다. 남자는 여자의 심경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연신 감탄사만 내뱉고 있었다.
“이야, 정말 멋있지 않아요? 이건 돈 주고도 경험하지 못한다니까. 제가 이래서 산을 끊을 수가 없어요.”
“네, 그러네요...”
남자는 여자가 이와 비슷한 어조로 대꾸를 해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자는 달랐다. 여자의 눈에 산은 그저 산이었고 힘든 건 힘든 것이었다. 그제야 여자의 마음을 눈치 챈 남자는 서둘러 여자의 상황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오늘 너무 무리한 것은 아닌지.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정상에 쌓인 눈처럼 쉽게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안해요. 정말. 제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저도 여기는 처음 와본 곳이라.”
남자는 말끝을 흐렸다.
“제가 산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남들은 산을 정복했다는 묘미나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었다는 마음에 희열을 느낀다고 하는데 저는 좀 다르거든요. 뭐랄까. 숨이 차는 느낌이 좋다고 할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 정말이지 한 발자국도 내딛기 힘을 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나뭇가지에 고스란히 쌓여있는 눈과 흙과 솔방울을 밟을 때 사박사박 내는 소리. 그런 게 좋아요.”
남자는 제법 진지했고 남자의 말을 듣는 여자는 더욱 진지했다.
“산, 산, 산! 이번엔 또 어떤 산인데?”
“너와 처음 갔던 곳, 그곳에서 너에게 해줄 말이 있어.”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달빛이 그대로 비치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가 옆에 턱 와서 앉았다. 희끗하게 센 턱수염을 거칠게 깎은 박 씨 아저씨였다.
“강 씨, 오늘도 나왔네 그려.”
“박 씨 아저씨도 여전하시네요.”
오늘도 한적한 동네 냇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았다. 냇가라는 표현이 어색할 정도의 큰 지류여서, 우리 동네의 숨은 낚시꾼들에게는 아주 중한 장소였다.
퇴직 후에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어 수도권 언저리의 한 동네로 내려 온 것이 이래저래 좋은 선택이 된 셈이다.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이사를 온 뒤에도 한동안 동네 사람들과 소원하게 지냈는데, 달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나란히 앉으니 자연스레 이야기꽃이 피는 것도 이 밤낚시의 묘미 중 하나였다.
나는 낚시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전문적으로 파고들 정도는 아니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다들 혼자 집에 있기가 심심하니 그저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하며 낚싯대 하나를 챙겨 냇가에 나왔는데, 어느 새 이 ‘낚시꾼 모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나이가 고만고만한 중늙은이들이 전문적인 장비도 없이 나란히 낚싯대를 내리고 있으니, 고기를 잡는 일도 드물었다.
“옛날에는 물속으로 그냥 뛰어들어 손으로 잡아 올려도 월척이었는데 말이야.”
박 씨 아저씨의 농담에 다들 말문이 트였다. 아마 우리가 몇 번이고 터뜨리는 웃음소리에, 잡힐 고기들도 다 도망치고 말았을 것이었다. 처음에는 다 재밌자고 하는 일인데 아무려면 어떤가 싶었다.
그래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니 조금은 고기 잡을 욕심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 낚싯대를 바꾸고 미끼를 바꿔가며 애를 써 봐도 소득이 없더니, 어느 날은 항상 웃음을 주도하시던 박 씨 아저씨가 물골에서 손바닥만 한 붕어를 낚아 올리셨다. 박 씨 아저씨는 제가 고기를 잡고도 놀라신 모양이었다. 매일 농담만 주고받느라 낚시는 뒷전이었던 우리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물론이다.
다음 날, 낚시꾼 모임 멤버들이 나만 빼 두고 무슨 계획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실상 나만 빼 두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가장 늦게 이사 온 나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엿듣는 모양새가 되어 한참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다가, 성이 나서 나도 무슨 이야기인지 좀 알자 했더니 모두가 껄껄 웃었다.
“그래, 강 씨는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모르는 이야기겠네. 여기, 김 씨 아저씨 고향이 저어기 부산에 있는 가덕도인데 말이야. 거기 숭어들이가 아주 유명하다고 해서 작년부터 한 번 가 볼까 하고 있었지.”
“며칠 전에 박 씨 아저씨가 붕어를 낚았잖아? 그거 보고 이야기로만 들었던 숭어들이가 생각 난 거야. 마침 가덕도 숭어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았다기에, 거기나 한 번 가 볼까 하고. 강 씨도 갈 거지?”
먼 길 여정이 달가운 나이는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조금 꺼려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니, 배 수 척으로 바다를 둥그렇게 싸고, 숭어가 지나 갈 때에 그물을 들어 올려 잡는 것이 숭어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는 다들 고기를 이렇게 잡았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기를 잡는 것은 가덕도가 유일하다는 말도 덧붙여졌다.
“사실 우리가 하고 있는 낚시도 고기를 찾아 가서 잡는 게 아니라, 고기가 바늘을 물어 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우리에게 딱 맞는 축제지. 안 그런가?”
박 씨 아저씨의 말에 또 다들 웃음보가 터졌다.
축제 날짜에 맞추어 부산으로 떠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박 씨 아저씨가 남긴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자꾸 어른거렸다. 숭어들이는 어류장이라는 분이 있어, 그 분이 한 평생 동안 고기가 가는 길을 알려주신다 하였다. 망망대해를 보고 있다가도 숭어 떼만 지나가면 기가 막히게 바다 위의 배들에게 신호를 보내 주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낚싯줄을 곱게 감아도 보고, 낚싯대를 행주로 박박 문질러 닦아도 본 끝에 전화기 앞에 섰다. 저녁만 되면 낚시를 하러 나온 것은, 저녁만 되면 울리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나는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한 번 들었다 놓아 보았다.
내일 낚시꾼 모임은 하루 쉬어야겠다. 내일도 숭어가 올 터이니, 내가 그 고기를 한 번 낚아보아야겠으니 말이다.
어느 날 문득 걸려온 전화 한 통. 초등학교 동창생에게 걸려온 전화이다. 사실 그녀가 학교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초등학교 동창생 인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거지를 하던 도중에 급히 받은 전화라 대충 받고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길어진 통화에 고무장갑까지 벗고 진지하게 전화를 받았다.
1993년 폐교가 된 생둔분교. 가물가물한 이름을 말하는 동창생이지만 일단 반갑게 통화를 했다. 평소보다 한 옥타브 정도는 더 높은 톤의 목소리에 동창생과 통화를 하는지 콜 상담원직원과 통화를 하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걸려온 전화의 요지는 이번 동창회는 특별하게 분교에서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드시 참석하라는 것. 권유가 아닌 통보다.
홍천에서 서울로 떠나온 지가 언제인데.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옛 친구들과의 분교캠핑이라니. 다 늙어서 무슨 캠핑이람?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다.
홍천 시내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나오는 오지마을. 그동안 궁금하긴 했다. 매캐한 연기와 콘크리트 덩어리들 사이에서 쉼 없이 달려온 그동안의 시간 속에서 이곳이 궁금하긴 했다. 학교도 친구들도 마음속으로 안녕을 전해야만 했던 추억들이었다.
미숙이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기는 척 동창회에 나가기로 했다. 약속장소 도착 5분 전 친구들이 나를 못 알아보면 어쩌나, 초등학교 친구들이라 얼굴이 많이 변했을 텐데. 똑같이 나이를 먹고 같이 늙어가는 처지였으나 어쩐지 늙는다는 것이 서럽게 느껴졌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동창회 소식을 알리던 미숙이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전화 속 목소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어머 반갑다. 얘, 얘는 어떻게 늙지를 않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엉?”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버스 안에 앉아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졸업을 하기 전 떠난 수학여행이 생각났다. 많지 않은 전교생이라 소풍 정도로 보였겠지만 그 나름의 추억이 있었다.
도심의 때가 묻지 않은 마을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롭다. 점심도 그때의 추억 그대로 김밥에 주황색이 진한 환타 병까지 준비되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어색함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세월이 무색하게도 어색함이 없는 친구들. 맨 앞자리에 앉던 키 작은 친구, 뺑뺑이 안경에 반에서 일 등만 하던 반장 모두 그대로이다.
남자들은 물고기를 잡겠다며 바지를 걷어 올리고 족대를 들고 한껏 들뜬 모습으로 계곡으로 향했고 여자들은 금방 쪄낸 옥수수를 하나씩 들고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일찍 시집갔던 친구는 벌써 손주를 보았고 여태껏 일만 하다 결혼을 못 한 친구도 있었다. 삶이 다 제각각이었지만 다들 열심히 살았나 보다.
언젠가 경비아저씨와 악을 싸우며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중년의 여성을 본 적이 있다. 내 나이와 비슷한 중년의 여성은 쉬지 않고 말을 했고 그 모습이 적잖이 꼴 보기 싫었다. 그 이후로 중년의 여성이 쉼 없이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름답지 않음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 앞에서 쉼 없이 지난날을 곱씹고 있다. 누가 보면 꼴 보기 싫을 수도 있으나 상관하지 않는다.
어느새 내 옆에 와 있는 미숙이가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
“거봐, 오길 잘했지?”
빙그레 웃었다. 오길 잘했다. 2013년이 아닌 1993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으니까.
밤공기가 제법 쌀쌀해졌다. 서울 도심 한복판이었으면 열대야라며 손부채질을 끊임없이 해댔겠지만 이곳의 공기는 청명했다. 달도 밝고 별도 쏟아질 듯이 빛났다.
어느 샌가 친구들은 모두 별을 바라보았다. 언제 다시 이곳에 모일 수 있을까. 벌써 헤어짐이 아쉬운 걸까. 그리움을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의 행복과 기억이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밤공기를 들이마셔 본다. 차가운지 따뜻한지 모를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와 마음에 머문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가을이건만 남자는 한여름처럼 땀을 뻘뻘 흘렸다. 너무 오래 걸어온 탓일까 걷는 것도 사는 것도 힘에 부치다고 느껴지는 하루였다. 남자의 머릿속엔 오직 하나.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남자에게 유일한 피붙이라고는 남동생 하나였다.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어릴 때부터 안해본거라곤 결혼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의 동생은 남자의 구속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더욱 엇나가기 일쑤였다. 남자의 동생은 12살 무렵 소년원에 들어갔다 나온 전적이 있다. 남자는 그런 동생을 때려도 보고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는 그저 동생이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남자의 직업은 정원관리사였다. 말이 좋아서 정원관리사였지 남의 집에서 청소, 빨래 등의 허드렛일과 함께 곁다리로 정원까지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집주인은 남자의 일하는 방식과 일처리의 결과에 만족하였다. 청소를 하라고 하면 청소를 하였고 정원관리를 하라면 정원관리를 했다.
“내가 이래서 자네를 믿어. 청소를 하라면 하면 그만이고 빨래를 하라고 하면 빨래를 하는 게 그게 어려운가? 지금까지의 사람들은 그게 참 안됐는데. 자네만 된단 말이지. 암. 그래서 좋아.”
남자는 집주인 남자의 말에 달리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정원을 정리하다 떨어진 나뭇잎들만 쓸어 모았다. 집주인의 말을 보면 남자는 지극히 단순한 일차원적인 일을 하였다. 명령이 떨어지면 그 명령대로 수행했다. 컴퓨터에 0이라는 숫자를 입력하면 0의 결과값을 나타내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집주인은 남자의 노예근성이 마음에 든 것이다.
남자는 처음 이 집에서 정원관리사로 일할 때 월급의 반을 줄이는 대신 남자의 동생과 함께 지낼 방 하나만 비워달라는 것이었다. 집주인은 그러마했으나 실제로 남자의 동생이 집에 들어온 것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주인은 남자의 월급의 반을 올려주지 않았다. 남자가 달리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달에 한번 남자를 곤욕스럽게 했다. 밤늦게 친구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남자는 조용히 집을 나온다. 하룻밤을 떠돌아 다녀야했다. 남자의 방에서 보란 듯이 자신의 친구들을 재우고 밤새도록 술을 퍼마셨다. 남자는 그래도 아무런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방을 우리에게 내어준 전제로 월급의 반을 깎지 않았냐고 한번은 따져물을 법도 하건만 남자는 그러지 못했다. 남자의 동생이 언제 들어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남자에게서 동생의 전화가 왔다. 받아보았더니 경찰서로 와달란 전화였다. 동생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른 모양이다. 그저 그 죄질이 가볍기를. 오늘 안으로 합의해서 나올 수 있기를 이러한 말만 수없이 되뇌며 도착한 경찰서 안은 공간이 주는 압박만큼이나 무거웠다. 남자는 분위기만으로도 동생의 죄질이 가볍지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동생이 이번에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을 담당 형사로부터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방화가 일어난 곳에 남자의 동생과 그 무리들이 있었는데 남자의 동생이 그동안 저질러온 전적이 화려하여 피의자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형사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형사도 그런 남자에게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불리한 진술에 거부할 수 있다는 말뿐이었다.
남자는 동생을 바라보았고 동생은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형사에게 물었다.
“만약 지금 들어간다면 언제 나올 수 있나요?”
형사는 적잖이 놀란 눈치로 아직 혐의가 인정된 것이 아니고 범인이라고 자백한 상태도 아니기 때문에 형이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고 했다.
형사의 말에 개의치 않은 남자는 한 번 더 물었다.
“죄질이 무거운 만큼 오래 있다 나오게 되겠지요? 그렇담. 저는 이제 좀 쉬어도 되는 건가요?”
형사는 남자가 꽤나 충격을 받아서 실언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물 한잔을 권했다.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저 한가로이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 예쁘게 꾸며놓은 정원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산책을 하는 것. 남자는 집주인을 떠올렸다.
아직까지 남자가 들어오지 않은 것을 알면 집주인이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형사에게 집에 좀 다녀오겠다고 했다. 언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지 않은 채.
때는 1990년도. 나는 설레는 스무 살이다. 아니 스무 살이었다. 풋풋하고 순진함이 가득했던 그 때. 스무 살.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그런 나이다.
왠지 스무 살은 그렇지 않은가. 고작 한 살 더 먹은 것 가지고 다른 세계로 순간이동을 한 느낌이다. 적어도 그땐 그랬다. 십대에서 이십대로 변화되었고 술과 담배를 지적받던 청소년은 작은 카드 하나만 내밀면 만사 오케이니까. 그것이 스무 살이 누리는 행복이라는 단어였으니까.
수능만 끝나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나의 이십대는 흩날리는 사월의 벚꽃만큼 하늘하늘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간 대학 그리고 짙푸른 잔디밭이 펼쳐진 캠퍼스를 꿈꿔왔던 나는 드디어 학교 동아리에서 첫 MT를 떠났다. 장소는 강원도 인제.
인제까지 가는 봉고차 안에서는 여행을 떠나요가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이때다 싶어 목청껏 따라 불렀다.
봉고차 안에서 나는 새내기다운 특유의 얌전함으로 창밖만을 내다보았다. 그때 옆자리로 다가온 한 남자, 현규선배다.
“혼자 뭐해?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이지?”
다정하게 웃는다. 웃을 때마다 미묘하게 움직이는 볼을 따라 보조개가 살짝 패인다.
“네. 안녕하세요?”
나는 멋쩍은 듯 웃었지만 현규선배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옆자리에 앉았다. 사실 현규선배는 우리 동아리에서 킹카로 불린다. 수수한 생김새를 하였지만 동아리 장답게 남자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옆에 앉은 선배보다 주위에 다른 사람 시선을 더 많이 살폈다.
도착을 알리는 내비게이션의 목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은 숙소에 짐을 날랐다. 여자들은 레포츠를 즐기기 위해 가벼운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듣기만 해도 시원한 내린천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인제는 열 가지가 넘는 레포츠를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는 2조로 나누어 내린천 래프팅을 하였고 진 팀에서 두 명을 선발해 번지점프까지 하기로 내기를 했다.
나는 현규선배와 같은 조였고 우리는 열심히 물살을 갈랐으나 상대팀의 덩치가 좋은 남자 선배의 리더십으로 우리 조가 지게 되었다. 번지점프를 해야 하는 사람을 뽑기 위해 가위 바위 보를 하였는데 그만 나와 현규선배가 걸리게 되었다.
이 무슨 우연의 일치인가. 나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선배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무서워하는 나를 말없이 꼭 안아주던 선배였다.
하나 둘 셋의 구호에 맞게 하늘을 날았다. 사월의 벚꽃이 하늘하늘 내리듯 그날 번지점프 위에서 내 마음도 하늘하늘 날았다.
낭만과 기대로 가득 찼던 첫 MT. 날이 저물고 캠프파이어 앞에서 통기타를 치던 선배가 생각난다. 돌이켜보면 즐거운 시절.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서른 즈음에 들어선 나는 괜히 그 때가 그립다. 이제는 웬만한 일에도 익숙해져서 인지 아니면 익숙함이 나를 익숙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의 풋풋하고 어리숙함이 그립다.
번지점프 대위에 올랐을 때, 현규선배가 나를 안고 뛰어내릴 때 내 심장소리가 그에게 들렸을 까 고민하던 그 때로.
다시금 그 장소에 가보고 싶다. 무작정 떠나본다. 지갑, 휴대전화, 사진기 한 장 달랑 들고 떠난다. 사진첩에 담긴 그 장소 그 자리에서 다시 사진을 찍어본다. 선배도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바람이 불고 나는 네가 그립다.
오늘로 단종께서 유배령을 받은 지 꼬박 닷새만이다. 한참을 걷고 또 걸어 겨우 주천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단종께서는 심신이 매우 지친상태로 보여 걱정이 됐다. 겨우 12살인 단종. 역사는 어린나이에 숙부에게 왕의 자리를 내어주고 유배령을 받은 비운의 왕으로 기억할 것이다.
단종께서는 많이 지치셨는지 입이 바싹 말라있었다. 마을을 둘러보기도 전에 물 한 모금을 청할 곳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우물가를 발견하고 단종은 물 한 모금을 겨우 마시며 지친 몸을 풀어야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유배 행렬은 다시 이어졌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고 험준한 산을 올라야 했다. 행렬을 뒤따르는 우리는 물론 단종께서도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으나 단종께서는 고갯마루에 다다르자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육신을 떠올리며 궁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세상에 어떤 왕이 자신을 위해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며 흙바닥에 큰절을 올릴 수 있을까. 단종은 그저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는 것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마침내 낡은 나룻배를 타고 외딴 섬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청령포라고 불리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에게는 수라를 올릴 궁녀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울창한 소나무 숲뿐. 단종께서는 소나무로 우거진 섬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자신보다 정순왕후의 걱정을 먼저 하였다.
우리는 급하게 밭에서 옥수수와 메밀로 수라상을 올렸고 우리가 청령포에 도착한지 5일이 지난 후에야 궁녀4명이 도착하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더 지나도 단종께서는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였다. 한양에 남겨둔 정순왕후 때문이리라. 단종께서는 종종 뒷동산에 올라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탑을 세우곤 하였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지 못한 설움과 미안함으로 단종은 자주 눈물을 보였다.
그런데 이곳의 생활도 그렇게 길지는 못하였다. 홍수가 나 거처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풍헌으로 유배지를 옮기자마자 한양으로부터 사약을 받으라는 명이 들려왔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한없이 많은 슬픔을 간직한 왕, 나의 왕이 죽음을 맞았다.
차마 슬픔으로 가득한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고 동강에 버려졌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고자 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포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왕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신하로서의 예도 다하지 못하다니.
쉽사리 누구 하나 나서는 이 없던 그때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소식을 전해왔다. 단종의 시신을 자신이 거두겠다는 것이다. 그의 단호한 전갈에 마음이 저려왔다. 진작 마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기 때문이리라.
급히 동강에 버려졌던 왕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엄흥도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단종의 시신을 거둔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전갈이 도착했다. 엄흥도가 생을 마감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또 한 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엄흥도는 그는 무심하게 솟아오르는 소나무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여전히 나의 왕 그리고 우리의 왕을 영원히 지키리라.
나의 오래된 꿈 중에 하나는 바로 시인이다. 시는 곧 인생이며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여겨왔던 나는 늘 항상 옆구리에 오래된 시집 하나를 끼고 다녔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인지 시를 쓰며 세상을 그리고 현재의 환경을 비뚤어진 필체로 휘갈겨 쓰며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도 나는 내 인생이 탄탄대로의 삶으로 이어질 줄 알았다. 남들처럼 멋지게 시 한편 적어 신춘문예 당선은 물론 등단작가로서 시나 읊으며 살 줄 알았는데 나는 지금 그저 그런 글쟁이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도 조금의 위안이 된다면 국문과를 졸업했다는 희미한 스펙으로나마 자그마한 신문사에 취직을 하여 20여 년간을 묵묵히 시 곁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간간히 내로라하는 신문사의 이름을 달고 올해는 누가 신춘문예 당선이 됬다더라 누가 새로운 시집을 발간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저 밑바닥에 있던 꿈이 불쑥 하고 올라왔다 다시금 잠잠해지는 것 빼고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달까.
대학시절 나는 내 친구와 함께 ‘담쟁이’라는 시와 문학이라는 동아리에 가입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치 80년대 영화처럼 빙그르르 모여 앉아 서로의 시를 감상하며 우수에 젖어들곤 했다. 나는 그곳에서 단발머리 여자아이를 좋아했기에 그녀에게 들려줄 만 한 시를 쓰느라 밤새 몇 장의 종이를 찢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내 친구 녀석도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가 좋아서 시를 감상하기 위해서 모인 동아리 모임이 피 튀기는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을 무렵, 내 친구가 ‘소녀’라는 시로 발표를 할 때였다. 동그랗게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 시의 소녀가 그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와 그 녀석뿐이었다. 어쩐지 그녀는 ‘소녀’라는 시를 무척 좋아했다. 이후 나는 제대로 된 게임도 못해보고 뒤로 물러나야 했고 동아리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탈퇴를 하였다. 이후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친구 녀석은 유명한 시인이 되어 잘 먹고 잘산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서일까 그 친구 녀석에 대한 질투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저 유명한 시인이 되어 잘 먹고 잘 산다는 그 말에 잠시 동안 생각이 멈춰있을 뿐이었다.
“김부장님, 부장님도 소싯적에 시 쓰셨다면서요? 그럼 신춘문예 같은데 넣어보시지 그러셨어요. 아참, 이번에 칼럼대신에 <소녀>로 등단한 시인B님 시가 연재 될 예정이라는데 부장님 아는 사람일 거라고 하던데요?”
모르는 이야기다. <소녀>로 등단한 시인B라 하면 그 녀석인가 보다. 갑자기 내 책상서랍 제일 밑에 내가 가장 아끼는 시집이 생각났다. 그리고 가끔씩 시를 끼적이던 습작노트도 보기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분명 그 녀석에 대한 질투는 사라지고 난 뒤였는데.
나는 퇴근길에 언젠가 가보겠다며 벼르고 벼르던 시인의 길로 발길을 돌렸다. 젊은 날엔 호기롭게 여기에도 내가 쓴 시가 당당하게 한 자리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 이야기 하고 다녔는데 어쩐지 나는 이 길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녀석이 이 길의 중심 돌이라면 나는 그 곁에 머무는 나무 하나에 지나치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다. 시인의 길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지만 나는 이때까지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시의 그리고 시인의 언저리에서 머무는 삶처럼 살다 가려는 마음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길은 생각보다 짧았다. 무언가를 생각하기엔 짧았고 하나하나 음미하며 걷기엔 조금 길었다고 하면 맞겠다. 오늘의 기분을 시로 쓴다면 어떨까 하고 잠깐 생각해봤다. 어쩐지 육두문자를 머금고 들어선 시인의 길에서 지금 이렇게 길 마지막에 서 있는 지금은 나름 홀가분한 기분이 더 컸다.
시인의 길. “다 좋은 말들뿐이군.” 하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멀리서 여중생들의 무리가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분위기 확 깬다는 생각을 하며 획하고 뒤를 돌아본 순간 여중생들은 시인B, 그러니까 내 친구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야, 너 <소녀>읽어봤어? 그것도 시라고 썼냐? 촌스럽게.”
“원래 시는 촌스러운 거야. 몰라? 그리고 그 사람 나이가 있잖아. 그 정도면 봐줘. 그리고 요즘 누가 시를 사서 아냐? 그냥 교과서에 나오는 거나 대충 읽다 마는 거지. 그것도 시험에 안 나온다고 하면 시따위 그거 읽지도 않아.”
여중생들은 몇 마디 나누지는 않았지만 꽤나 마음에 맺히는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시인B의 시를 제멋대로 평가하면서 말미에는 시따위라며 시를 철천지원수인양 떠들어댔다. 나는 그 여중생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재빨리 시인의 길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시로 쓰여진 그 길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그리고 자기 전에 한동안 쓰지 않던 ‘시 한편을 써야 겠다’라는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