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썩철썩 파도가 몰아치는 밤이었어. 밤이면 밤마다 한 꼬마아이가 높이 뜬 달을 보고 기도를 하는 거야.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말이야. 무슨 소원을 그렇게 간절하게 빌고 있나 이야기를 들어보았지, 그랬더니 자기네 집이 이사를 하게 되었다는 거야. 그런데 동네가 철거되면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지 뭐야. 그래서 이사 가지 않게 해달라고, 친구들과 함께 학교도 가고 말뚝 박기도 하게 해달라고 벽에 기대어 달을 바라보고 기도를 하는 것이었지.사실 이 아이는 동피랑 마을이라는 벼랑 끝 동네에 살고 있어. 통영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아침이면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눈이 떠지는 마을이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낡고 허름해진 벽과 지붕들로 재개발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 아이는 엄마, 아빠가 밤에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된 거지.
그때였어! 아이가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신기한 일이 벌어 진거야. 어디선가 작은 음성이 들려오더니 새끼 손톱만 한 다섯 명의 꼬마요정들이 나타난 거야. 그러고는 속닥속닥 무슨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어. 그러더니 아이의 집에 들어가 아이가 쓴 그림일기장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나와 아까 그 아이가 서 있던 벽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거야. 그리고는 엄지손가락만 한 붓을 꺼내어 벽에 대고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겠어?
손톱만 한 꼬마요정들의 움직임으로 저 커다란 벽에는 아이의 그림일기장에 그려진 그림으로 순식간에 가득 메우기 시작했지.
다음날 학교에 가려고 나온 꼬마와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어. 누군가가 어두운 밤에 벽에 그림을 그리고 사라졌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 아이는 자기의 그림일기장에 그려진 그림을 알아채고는 말했어.
“달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시려나 봐요!”
신이 난 아이는 매일매일 일기장에 예쁜 그림들을 그려 넣었어. 예쁜 동백꽃, 고래, 친구와 말뚝 박기 하던 날, 재미있게 읽은 어린 왕자 등등 …….
그렇게 그림일기를 그려 넣고 자기 전에 똑같이 기도를 했지. 그러면 어김없이 요정들이 나타나 그 그림들을 동네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그러자 마을 사람들에게도 이 이야기가 소문이 나기 시작 한 거야. 마을 사람들 모두 아이의 집 벽에 그려진 그림들이 너무 예쁘다고 부러워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철거하기로 한 날짜가 얼마 남지 않게 된 거야.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동피랑을 떠나기 전 자신의 추억들을 하나씩 남기기로 했지. 그래서 자신들의 집 벽마다 저마다의 소중한 추억들을 그려 넣기 시작했어. 각자 자신들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남은 집을 떠나려니 더욱 마음이 아팠어.
그래서 이 아이는 다시금 두 손을 모아 쥐고 기도를 했어.
“달님. 우리 마을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게 해주세요.
마을 사람들 모두 흩어지지 않고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말이어요.
그리고 우리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이 그림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었으면 좋겠어요. 달님.”
그러자 꼬마요정들이 나타나 마을 골목골목에 비어있던 벽들을 향해 바람을 불어넣었어. 그랬더니 집 벽면에 그려진 그림처럼 골목마다 아름다운 그림들로 넘실거리는 거야.
이웃마을에 점점 소문이 나고 점점 동피랑 벽화에 관한 이야기가 퍼져 나갔어. 그랬더니 전국 방방곡곡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림을 보고 웃으며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겠어?
동피랑은 꽃이 피는 마을이라며 말이야. 마을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너무나 행복했어. 그리고는 마을 사람들과 이 꼬마아이의 간절한 바람이 마을을 지키게 되었던 거지.
아이는 너무 기뻤어. 마을 사람들도 모두 함께 기뻐했지.
지금도 동피랑에 가면 아름다운 벽화를 만날 수 있어. 그리고 마을 어딘가에서 지금도 꼬마 요정들이 마을 곳곳에 새로운 그림들을 그려 넣고 있다고 해!
언젠가 동피랑 마을을 찾아가게 된다면 꼬마요정들이 벽화에 남긴 숨은 메시지를 찾아봐도 좋아!
청주는 마치 머나먼 이국의 낯선 땅과 같았다. 심지어는 자동차를 타고 얼마나 걸리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 미지의 곳이었다. 나에겐 천안 즈음이 아래지방의 마지노선과 같았기 때문이다.
청주로 가야해. 당장 다음주부터.
청주는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청주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대문짝만한 간판, 전화 부스, 심지어는 쓰레기통에까지 온통 직지라는 단어가 새겨져있었다. 직지? 직지 혹시 직지심체요절할 때 그 직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이라 학교에는 온통 한층 들뜬 표정의 신입생들이 모여 있었고 저마다 각기 다른 지역에서 모였겠지만 청주라는 공간에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유대감을 가지고 있는듯했다. 그들도 보았을까? 직지라는 단어를. 그리고 손으로 直指의 한자어를 그려보았을까?
마치 자신의 마니또를 찾기라도 하듯 학생들은 두리번거리며 자기와 성격이 맞을 만 한 친구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우연히 옆자리에 서있던 친구 사실 재수를 했을지도 모르는 잠정적 친구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청주는 교육의 도시잖아. 그런데 직지를 손으로 쓸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뭔 소리야. 뜬금없이.”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사람을 본 것 마냥 이상한 눈총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청주를 들여다보면 직지라는 글씨밖에 안보여. 그게 내가 본 청주의 첫인상이야.”
“너도 참 별나다.”
모르는 이에게 최대한 좋은 말로 대꾸를 해준 것이다.
알지모르겠지만 청주는 교육의 도시로 유명했다. 한때는 괜찮았던 대학교들이 밀집되어 있었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교육을 이어나가기 위해 청주를 찾는다.
교양과목으로 듣는 한자수업. 나는 가장먼저 直指를 손바닥에 끼적여봤다. 이거 맞지? 속으로 말했다. 왜 나는 한자수업시간에 직지를 그리고 있을까? 그저 교수님이 갑작스럽게 발표를 시켰을 때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망신을 면하기 위해서? 아니면 내 머릿속에 자리 잡혀 있는 청주 이꼬르 직지가 멍자국처럼 아직은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일까?
언젠가 꼭 가봐야겠다. 4년 동안 설마 한번 안 가보겠어? 공강시간도 있는데. 4년 동안 나는 직지에 대해 혹은 고인쇄박물관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수없이 많은 간판, 전화 부스, 쓰레기통에 새겨진 직지를 보면서도 익숙함에 대한 본능 때문인지 직지에 대한 처음의 궁금증이 타오르지 않았다.
어느덧 4학년 2학기. 청주에서 겪었던 많은 일들, 수 없이 지나간 도로, 자유를 갈망하며 걸어왔던 젊은 날.
드디어 마지막 방학이다. 방학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방학이다. 그저 놀다가 2월 달 졸업식에만 참석하면 길고도 짧았던 4년 동안의 대학생활이 종지부를 찍는 날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사람들은 어떠한 이유나 명분을 가지고 술을 마시려 하기 때문에 종강이라는 명분은 젊은이들이 취하기에 더 없이 좋은 핑계거리였다.
부어라 마셔라. 거나하게 취했다. 주량이 세지 않은 나였지만 4년 동안 미운 정 고운 정 쌓였던 곳에서의 마지막이라고 하니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야, 황준수 너 그때 기억 나냐?”
“뭐? 그때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 인마.”
“아, 왜 우리 학교 처음 오리엔테이션했을 때. 대강당에 다 모여 있었을 때 네가 나한테 물어봤던 거. 청주가 교육의 도시인데 직지를 한자로 쓸 수 있나 없나 물어봤던 거 말이야. 나 그때 너 진짜 또라인줄 알았는데. 그게 벌써 4년 전이네. 세월 빠르다.”
아참. 그랬었지. 잊고 있었다. 직지를. 아니 직지에 대한 호기심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에 버스를 탔다. 창밖너머로 직지의 고장 청주라는 간판이 화려하게 빛났다.
엄마는 시든 꽃처럼 좀체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다. 얼마 전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퇴임이라는 이름으로 등 떠밀려 퇴사를 하시고는 집에서 가사일 만하는 전업주부의 삶에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하셨다. 나와 언니, 오빠는 이제 그만 집에서 쉬시라고 그만큼 자식들 뒷바라지 하며 사셨으면 됐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일에 매진 하냐고 했더니 엄마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하신다.
“자식들 뒷바라지 때문이 아니야. 니들은 니들이 알아서 사는 거고 나는 내 알아서 사는 거지. 자고로 사람은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럼 엄마 잘하는 그거 있잖아. 비즈공예랑 뜨개질. 그거 예쁘게 만들어서 저기 예술의 거리에서 가게 하나 얻어서 그거 파는 건 어때?”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홀로 우리 삼남매를 키워야 했다. 엄마는 자식들 뒷바라지를 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홀로 삼남매의 의식주와 교육까지 책임져야 했던 엄마의 인생에서는 쉼표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열심히 뛰어야 했다. 아주 잠깐 쉰다고 하면 우리 오빠랑 언니가 고3 수험생일 때 밤늦게까지 공부한다고 해서 같이 밤을 새며 뜨개질이랑 비즈공예를 하며 본의 아닌 취미를 만들어 나가신 것 빼고는 없었다. 사실 엄마의 인생에서 봄이 있었을 까 싶을 정도로 엄마는 참 힘들고 바쁘게 사셨다. 그런 엄마보고 이젠 좀 쉬시라고 해보아도 소용이 없다. 어찌 지난 25년간의 삶의 패턴이 쉽게 바뀌기야 하겠느냐며. 그러던 중 언니는 나름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엄마가 손재주가 좋다는 것을 이용하여 퇴직금으로 받은 돈과 우리 삼남매가 돈을 보태어 작은 공방 아닌 공방을 차려드리는 것이다.
“예술의 거리? 내가 뭐 예술가도 아니고 이건 그냥 취미라 누가 사가는 사람도 없을 텐데. 잘 될까?”
“그러니까 공방에서 아줌마들 모아서 만드는 법도 알려주면서 팔찌나 목걸이 뭐 그런 거 파는 거지.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꽤 잘 되던데? 엄마 실력 정도면 충분해. 그리고 요즘 젊은 사람들 트렌드가 요런 복고거든. 그래서 딱 좋은 것 같은데?”엄마는 이렇게 나누는 말 뿐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생기를 되찾으신 듯 했다. 엄마의 억척스러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진취적인 결정으로 일을 밀어붙일 때이다. 엄마는 약 일주일간 이곳저곳을 알아보시며 신중히 고민을 하신 끝에 우리 삼남매를 불러 앉혀놓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셨다고 하셨다.
엄마는 예술의 거리에 10평 남짓한 공간에 세를 받아 가게를 차렸다. 작은 평수임에도 아기자기한 물건들로 꾸며 놓으니 제법 괜찮아보였다. 옆에는 작은 소극장들이 있어서 공연을 기다리는 젊은이들이 구경하며 몇 개씩 구입하기도 하여 목도 괜찮았다.
한 4개월 쯤 되니 차차 단고로 생기고 옆 가게 아주머니들과도 친목을 쌓았다. 엄마는 완전히 만개한 꽃처럼 생기를 되찾으셨다.
“어서오세요. 아, 정선생님 오셨어요?”
엄마가 정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엄마 가게 앞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시는 늦깎이 남자 배우이시다. 정선생님도 회사 정년퇴임을 하시고는 소싯적 꿈을 펼치시고자 공연장에서 배우로 활동하게 되셨다고 했다. 마침 공연장에서는 노년의 삶에 대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당히 오디션도 합격한 엄연한 배우이시라며 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정선생님께서는 공연 준비 한 두 시간 전에 엄마 가게에 놀러 오신다고 했다. 두 분은 가끔 차를 마시며 담소도 나누시며 가깝게 지내시는 것 같았다. 나와 언니도 엄마 가게에서 정선생님을 한 번 뵌적이 있었는데 중후한 외모에 인품도 좋은 신 것 같고 무엇보다 정선생님도 몇 해 전에 아내와 사별하여 혼자라고 하셨기에 슬쩍 엄마에게 잘해보라는 말을 건넨적이 있다. 물론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아, 박여사님. 저기, 오늘 혹시 시간되시면 제 공연 보러 오시지 않을래요? 오늘이 제가 주인공으로 서는 마지막 공연이 될 것 같아서요.”
“아, 그러세요? 그렇담 가야지요. 8시 반 공연이라고 하셨나요?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엄마는 8시에 근처 꽃가게로 가셨다. 아마 정선생님께 드릴 꽃다발을 사시는 것 같았다. 엄마는 밝게 웃으셨고 왠지 엄마에게 여러모로 두 번째 봄이 온 것 같았다.
드디어 부처님 오신 날이다. 십 분만 일찍 깨워도 하루 종일 짜증을 내는 나이지만, 오늘만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분주히 움직였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불자이시지만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일 년 중 딱 하루, 부처님 오신 날만큼은 내게도 특별한 날이다. 평소에는 집 근처에 있는 절에 다니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는 초파일에만 이른 아침부터 시외버스를 타고 범어사에 가신다. 그리고 나는 몇 년 째 범어사 가는 길에 동행하고 있다.
내가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니, 오래되었다면 오래 된 이야기다. 친구와의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도시락을 싸 들고 어머니와 할머니를 따라 나섰는데, 그 곳에서 꿈속의 풍경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줄기마다 보랏빛 포도송이가 매달린 신비한 나라에 가는 꿈을 종종 꾸었다. 산자락 한 귀퉁이로는 맑은 샘물이 솟고, 그 안에는 자잘한 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큼직큼직한 바위들 사이로, 거대한 나팔꽃처럼 굵직한 나무줄기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는 그 모습에 반하여, 하루는 꿈에서 깬 뒤에 그 숲의 모습을 남몰래 크레파스로 그려 두었었다.
몇 년 뒤, 어머니께서 그 스케치북을 발견하시며 이 숲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스케치북을 보시고는, 어머니가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요 녀석, 여기 갔던 걸 기억하고 있네? 아주 코흘리개일 때 데리고 갔었는데.”
그랬다. 어렸을 때 할머니 손에 이끌려서 갔었던 범어사의 등나무 숲이 꿈속에 나왔던 것이다. 이어지는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연보랏빛 등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포도나무 숲이라며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었다고 한다.
“정말 괜찮겠니? 이따가 엄마랑 할머니랑 같이 가지 그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지만, 나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된 내가, 어머니의 눈에는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자꾸만 나를 돌아보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범어사로 올려 보내고,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등나무 숲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안개가 짙었다. 등나무 꽃이 구름처럼 핀다 하여, 이곳을 등운곡(藤雲谷)이라고도 부른다 하였는데 안개와 등나무 꽃이 한 군데 어우러진 모습이 정말 신비로웠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오래 걷지를 못하는 탓에 잠시 등나무 숲 한 복판에 주저앉았다.
“등나무는 지가 살려고 소나무 같이 좋은 나무를 감아 올라가서 다 죽이삔다 아니가.”
구불구불한 등나무 사이로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쭉 뻗어 있는 모습을 보자, 작년 이곳에 왔을 때 들었던 이 동네 할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나는 그 날 집에 돌아가 방문을 잠그고는 숨을 죽여 울었다.
하나 뿐인 아들, 하나 뿐인 손자가 갑자기 사고를 당해 지팡이를 짚고 다니게 되자, 어머니와 할머니가 내 다리를 낫게 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니셨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춘기를 겪고 있던 나는 지팡이를 짚고는 도저히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검정고시라도 준비했으면 되었을 텐데,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절망감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기만 했다. 결국 나는 대학에도 가지 못했고, 취직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에 틀어박혀 백수가 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도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만 하셨다.
저 멀리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단숨에 나를 찾아내어 달려오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또 소나무 생각을 했다. 넘어지지는 않았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익살스럽게 내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내밀어 보였다.
“이 녀석이 있잖아요.”
할머니가 웃으며 끼어드셨다.
“녀석, 그 지팡이도 요 등나무로 만들었다는 건 알고 있누? 지팡이 중에서는 등나무 지팡이가 최고지. 옛날에 신선들도 다 등나무 지팡이 짚고 다녔다잖어.”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소나무를 죽이는 등나무가 아닌, 다른 이들이 짚고 일어설 수 있는 등나무가 되고 싶었다. 어렸을 때에는 포도송이처럼 보였던 등꽃들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해가 지면 범어사 안에는 등불이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저도 꽃을 피울게요, 어머니.”
어머니는 말없이 나를 끌어안고 우셨다.
주말인 오늘은 승호가 가장 기다리는 날 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아빠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나는 날이기 때문이지요. 눈을 뜨자마자 승호는 아빠에게 달려갑니다. 오늘의 목적지가 궁금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빠는 어떤 영문인지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아빠 다리에 매달려도 보고 힌트라도 달라고 졸라보아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돌아오는 말이라고는 그저 잠자코 아빠만 믿고 따라오라는 말뿐이었습니다.
궁금증과 기대에 한껏 들뜬 승호는 연신 싱글벙글하며 동생인 연호에게 자랑도 늘어놓았습니다. 드디어 출발입니다. 아빠 차에 탄 승호는 엄마와 동생에게 인사를 한 뒤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는 바람에 승호는 그만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집에서 출발한 뒤 무려 3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잠에서 깬 승호는 도로 이정표를 보고 강원도 태백에 와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승호는 속으로 오늘 아빠와 둘이 등산도 하고 맛있는 한우도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 그런데 도착한곳은 태백산도 아니고 한우고기집도 아닌 석탄박물관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급격히 실망한 승호는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아빠가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고 여기로 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일단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책에서만 보던 광부들이 캄캄한 동굴에서 석탄을 캐는 모습과 그 시대 광부들의 삶을 모형으로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형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향해 아빠는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옛날에 승호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니까 아빠가 딱 승호만한 나이였을 때였어. 아빠의 아빠. 그러니까 승호 할아버지는 여기 보이는 사람들처럼 석탄을 캐는 광부셨어. 할아버지도 이렇게 검은 때가 온 몸을 뒤덮어도 열심히 일하셨지. 우리 승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삼겹살 있지? 그것도 사실 이렇게 하루 종일 탄가루에 뒤덮여 있는 광부들이 검은 가루가 씻겨 내려가라고 먹었던 음식인거 알았니?
그리고 아주 가난하던 시절 가족들의 끼니와 교육을 위해 앞이 보이지도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 막장에서 땀 흘려 일하셨단다. 할머니는 노란 양은 도시락에 부족하지만 정성스레 담은 도시락을 매일 싸드렸어.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지. 달그닥 달그닥 빈 도시락 통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도 반가운 마음에 버선발로 뛰어나가셨던 모습이 생생해. 석탄 캐는 일이 목숨을 내놓고 일할만큼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도시락 소리가 들려야만 안심을 하곤 했었지. 승호 넌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정말 멋진 일을 하시던 분이셨어.”
이야기를 하는 아빠의 눈이 잠시 붉어졌습니다. 개구쟁이 승호도 이야기를 듣고는 얌전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습니다. 아빠가 왜 오늘 다른 곳이 아닌 태백에 석탄박물관에 왔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 승호는 4시부터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두 시간 뒤에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오실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승호는 아빠와 석탄박물관에서 들었던 아빠의 이야기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아 아빠도 할아버지가 보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빠 몰래 승호가 맛있는 저녁밥을 만들어드리기로 마음먹은 것이지요. 서툰 솜씨지만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고 아빠가 들어오셨습니다. 으쓱한 마음에 승호는 아빠에게 달려가 품안에 쏙 안기며 아빠를 위한 멋진 선물을 준비했다고 말했습니다.
삼겹살에 돼지고기 김치에 돼지껍데기 등 돼지고기로 가득한 한 상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빠 귀에 대고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아빠, 아빠도 할아버지처럼 정말 멋진 아빠에요!”
아빠도 승호도 정말 푸짐하고 따뜻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을 높이 올려다보려니 핑하고 현기증이 났다. 퇴근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행인이 많았다. 지수는 선배가 소개해 준 도자공방을 찾는 중이었다. 공방 이름과 간단한 약도가 적힌 메모지를 들여다보다가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을 한번 더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고약한 냄새를 풍기던 은행나무에 손을 짚고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대었다. 여기가 아닌가 싶을 때 지수의 눈에 들어온 자그마한 공방 하나.
지수는 회사에서 맡게 된 ‘우리 고장 바로 알기’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야 했다. 입사 후 처음으로 맡은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지수는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 도자기라니 말만 들어도 지루하고 따분했다. 지수는 학창시절 여학생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한 십자수니 비즈공예니 하는 것들에 눈길 한번 준 적이 없었다.
또각거리는 신발을 다시 한 번 고쳐 신은 지수는 자그마한 공방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널찍한 실내에는 갖가지 도자기와 사기그릇, 앙증맞은 실내 인테리어 장식품까지 단정하게 놓여있었다. 문에 걸린 종이 딸랑거리자 상냥하고 단정해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어서 오라는 여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자기 만드는 법 좀 배우러 왔다며 용건을 말했다. 지수의 급한 성격이 여기에서 나왔다. 여자는 친절히 지수를 안내했다.
지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흙을 만졌다. 반죽된 흙을 쓰다듬듯이 만지는 지수를 보고 여자는 주물러 보라고 했다. 지수가 공들여 받은 네일아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쉬워 보였던 물레를 돌리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정신집중을 하지 않으면 금세 틀에서 벗어나기 일쑤였다.
‘하아, 따분해.’
지수의 속마음이라도 들리는 걸까 여자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대꾸했다.
“많이 따분하죠? 처음 하시는 분들은 다들 그러시더라고요. 영화나 텔레비전으로는 쉬워 보이죠. 그런데 정신 집중 안 하면 틀 하나 잡는 것도 어려운 게 바로 도자기에요.”
지수는 정신을 집중했다. 손의 감촉을 느끼고 흙이 전해주는 소리와 느낌에 신경을 기울였다. 질척거리지만 부드러운 그 촉감을 손끝 감각으로만 느끼려 했다.
‘아, 살아있는 것 같아.’
지수가 빙긋 웃자 여자도 따라 웃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흙의 감촉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자가 말했다. 특별할 것 없다고 그저 프로젝트만 잘하면 그뿐이라고 여겼던 지수에겐 적잖이 놀라운 일이었다.
지수는 공방에 들어올 때 보았던 사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투박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지수는 틈틈이 공방에 들렀다. 지수는 가만히 도자에 손을 대보았다. 가마에서 갓 나온 도자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따뜻함이 남아있었다. 흙의 기운일까 만든 이의 기운일까, 도자기는 여전히 투박했지만 따뜻했다.
조용하고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진중함과 무게감이 좋았다. 옛것이지만 촌스럽거나 싱겁지 않음을. 단순하지만 그 속에 묻어있는 화려함이 좋았다.
“지수씨, 뭔가 바뀐 것 같은데. 머리했어?”
회사선배가 지수 옆을 스치며 툭 던지듯 말했다.
“아니요? 딱히 바꾼 건 없는데…….”
지수는 말끝을 흐렸으나 달라진 것이 무언지 내심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제가 공방에서의 마지막 날이었고 공방 여자와 대화를 나눈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지수씨 제법 실력이 늘었어요. 성격도 많이 차분해진 것 같고.”
“그래요? 호호. 제가 원래 성격 급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웠는데, 여기 다니면서 많이 차분해 진 것 같긴 해요. 흙 만지는 것도 그렇고 물레 돌리는 것도 그렇고. 물레를 돌릴 때면 잡생각이 싹 사라지니까요.”
“선물이에요. 그때 한참 바라보고 있길래.”
여자는 지수에게 작고 아담한 사기그릇 세트였다. 사기그릇을 바라보느라 지수는 고맙다는 말도 잊었다. 손을 대어보았다. 여전히 투박하지만 따뜻했다.
어젯밤부터 내린 비가 그치고 이제 막 밝은 빛이 얼굴을 내미는 봄날입니다. 마당으로 민지가 작은 모종삽을 들고 나왔지요. 민지는 앞니 두 개가 빠진 개구쟁이 여덟 살입니다.
민지네 집은 경주에서도 아주 유명한 집이에요. 바로 민지의 할아버지 아니, 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쭉 경주에서 터를 잡고 대대로 경주에서 살아왔기 때문이지요. 민지네 할아버지는 경주의 토박이로 터줏대감 할아버지로 불리고 계시지요.
어쩐 일인지 민지는 아침부터 소란입니다. 마당에서 이리저리 삽을 들고 아빠를 재촉하지요. 오늘은 아빠와 작은 귤나무를 심기로 한 모양입니다. 어디에 심으면 좋을지 고민을 하던 민지는 작은 텃밭 옆에 한 곳을 가리켰지요. 민지와 아빠는 나무를 심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민지의 삽이 흙 속에 쑥 들어가자 덜거덕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무엇인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민지는 조심스럽게 흙을 파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자기 같은 물건이 땅속에 박혀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민지는 놀란 마음에 다급히 아빠를 불렀고 아빠는 조심스럽게 물건을 꺼내었습니다. 마당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민지의 할아버지가 마당에 나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마당에서 나온 청동으로 만든 접시를 살펴보았습니다.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감지하신 할아버지는 나라에 신고하셨고 민지네 집에 문화재 조사를 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민지는 어리둥절하여 아빠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어요. 아빠는 민지를 무릎에 앉혀두고 집 마당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민지야. 우리가 발견한 청동 접시 말이야. 저번에 민지도 가봤던 박물관 있지?
그곳에 전시될 거야. 그곳에 우리 집 주소도 적힐 것이고 발견자로 민지 이름도 적힐 거야. 어때? 신기하지?”
유물 그리고 문화재에 큰 관심이 없던 민지는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지요. 그래서 그날로 아빠를 졸라 경주에 있는 세계문화유산과 문화재를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민지는 사실 경주가 신라 천 년 역사를 품고 있는 도시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수학여행도 서울에서 경주로 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지요. 그런 민지가 아빠에게 먼저 경주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을 구경 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지는 먼저 별을 관측하였다는 신라인들의 과학지식이 엿보인 첨성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분황사를 지나 오릉까지 구경하며 스탬프를 찍고 신라 시대의 과학의 집결지인 불국사와 석굴암까지 둘러보았습니다.
그렇게 신라인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살아있는 천 년 역사의 고장 경주를 경험하고 온 민지는 그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졌습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역사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탓에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잠든 민지는 꿈에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민지가 빙그레 웃습니다. 꿈에서 신라인이라도 만난 것일까요? 아니면 마당에서 발견한 유물이 박물관에 전시된 상황을 본 것일까요?
그동안 민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경주의 문화재와 역사에 대해 너무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소중한 의미를 알지 못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직접 유물을 발견하고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깊이 느끼고 나니 자신이 경주에 살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뿌듯하게 느껴졌습니다. 잠든 민지가 한 번 더 빙그레 웃습니다.
배꼽이 뽈록하게 튀어나온 것 때문에 나는 어릴 적부터 별명이 참외였다. 난 참외를 보아도 내 배꼽이 생각나지 않는데 어른들은 내 배꼽이 참외에 썩 어울린다고 생각하셨나보다.
어렸을 적 동네 어르신들은 톡 하고 튀어나온 배꼽을 보고 귀엽다고 하시며 복이 있는 배꼽이니 부끄러워 할 것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참외를 보고는 항상 나를 부르시면서 참외야 이리와 봐라, ‘참외야’라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 뒤에 쪼르르 숨어 있다가 방으로 콩 들어가 버렸다. 동네에서 나는 참외야로 불렸지만 나는 그 별명이 참 싫었다. 우리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버젓이 있는데 그것도 굳이 내 콤플렉스인 참외로 불리는 것은 또 무언가. 나는 동네 어르신들이 ‘참외야’라고 부를 때마다 저는 참외가 아니라 지원이에요! 라고 해도 쬐끄만 참외 녀석이라고 할 뿐, 내 이름을 불러주시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커서도 나는 항상 헐렁한 옷을 입고 다니며 배꼽을 숨겨야했다. 친구들과 목욕탕도 함께 간 적이 없다. 수학여행 때에도 아이들이 모두 씻고 잠든 밤에 뒤늦게 씻고 자는 수고스러움까지 겪어야했다.
여름이 오면 시골에서는 유난히 수박, 참외 서리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누구의 소행인지 걸리기만 해보라며 씩씩거리셨지만 범인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우리 할아버지 댁뿐만 아니라 다른 할아버지 네도 참외서리가 범인이 다녀간 모양이었다. 그리고서는 나보고 참외야, 네가 훔쳐간것이 아니냐? 라고 물어보신 할아버지도 계셨다. 내가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어 봐도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마치 나를 범인 보듯 하시는 동네 어르신도 계셨다.
그러면 나는 ‘참외 싫다고요!’ 라며 소리를 꽥하고 지른 적도 있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참외가 싫었다.
아이를 가지고 배가 남산만큼 불러오니 배꼽이 더욱더 볼록하고 튀어나와보였다. 남편은 그런 내 배꼽을 보고 아이와 이야기하는 통로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항상 아이에게 말을 걸 때 내 배꼽에다 대고 이야기를 했다. 내가 배꼽에 콤플렉스가 있는걸 알면서도 그런다. 남편은 요즘 참외배꼽이 얼마나 매력 있는데 그걸 숨기냐고 능구렁이 같은 표정으로 말할 때면 나는 한참을 흘겨보고 만다. 남편은 아이의 태명을 ‘참외야’라고 지었다. 내가 질색을 했지만 남편은 귀여운데 왜 그러냐고 했다. 정말이지 내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이를 갖고 나서 심한 입덧으로 아무것도 넘기지 못할 때 그렇게 싫던 참외가 자꾸만 떠올랐다. 남편은 뭐 어려울 것 있냐고 마트에서 사다주겠다고 했지만 왠지 한입 베어 물면 생각했던 맛이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먹고 싶던 참외는 마트산이 아니라 할아버지 댁에서 밤에 몰래 서리를 해서 먹는 참외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자기야 있지, 진짜 신기하다. 내 별명이 참외였잖아. 그래서 참외는 정말이지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우리 아가 가지고 난 후부터 계속 참외가 땡겨.”
“그러니까 자기랑 참외는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라니까!”
“장난하지 말구, 만약에 말이야. 우리아가도 나처럼 참외배꼽이면 어쩌지?”
“뭐 어때? 귀엽기만 할 것 같은데?”
우렁찬 소리와 함께 여자아이가 쏙하고 나왔다. 의사선생님께서는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체크하시고는 갓 태어난 아이를 내 품에 안겨주었다. 언뜻 아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녀석도 나처럼 참외배꼽을 가지고 태어났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똑 닮은 아이를 낳았다는 신기함일까 쭈글쭈글한 상태로 울어대는 아이가 나와 똑 닮았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첫 인사를 건넸다.
“안녕? 참외야, 엄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