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네, 새댁!
반가운 말투로 인사를 하는 아주머니 말투에 아무런 반박도 없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실제로 오랜만에 들른 것도 아니었고 새댁 꼬리표를 달만큼 풋풋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시장으로 직접 올 때에는 시어머니의 부름을 받을 때이다. 결혼 준비 즈음 친구들은 시댁과의 거리는 최대한 먼 곳이 좋다고 했다. 없으면 더 좋고. 남자들이 생각하면 식겁할 이야기이지만 오죽하면 ‘시월드’라는 말이 나올까 한다. 거기에 시누이는 덤이다.
우리 어머님은 마산어시장에서 전어를 파신다. 우스갯소리로 너는 전어 때문에 절대로 집 나갈 일은 없겠다고 했지만 왜 없을까. 고부관계에서 기권을 들어버린 남편과 시누이가 무슨 벼슬인 줄 아는 시누이까지. 그렇다고 시어머니가 무작정 싫은 것은 아니었다.
새아가를 시장으로 불렀다. 며늘애는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지만 전화기 너머로 또 시장으로 부른다며 투덜거리는 음성이 귓가에 맴맴 돈다. 친구들이 왜 며느리 눈칫밥 먹으며 사냐고 당당히 살라고 하지만 요새 어디 그런가 싶다. 비린내 나는 손으로 손주 새끼들 얼굴도 못 만지게 하는 며느리 때문에 손주들을 미술관 전시품마냥 ‘좋아라’ 보기만 해야 할 때도 있다. 며느리와의 사이가 소원해진 건 시장을 맡아서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부터였다.
요즘 누가 시장에서 장사하는 걸 환영하겠느냐마는 그렇게 남처럼 퉁명스럽게 피할 줄은 몰랐다. 하기야 요새는 집 비밀번호 물어보면 왜 빈집에 들어가려고 하는지 그냥 자기네들 있을 때 오라고 하라고들 한다더라.
“어머니, 저 왔어요. 그동안 별 일 없으셨죠?”
그동안 이라는 단어에서 어색함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남의 집에 오는 사람처럼 꼭 무엇을 들고 온다.
“뭘 이런걸 사와. 그냥 오지.”
“그래도요.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시장. 그만 두기로 했다고. 그 말 하려고 불렀다. 비린내도 지겹고 힘에 부치기도 하고. 그리고 너한테 이어받으라는 그런 말도 안하마. 그냥 팔기로 했어.”
“어머니.”
“아무 말 마라. 그렇게 하기로 했어. 아범도 그렇게 알고 있을 거고. 삼 대째 이어왔으면 그걸로 됐지. 언제까지 이어하겠니.”
시어머니의 눈에는 살짝 눈물이 맺혔으나 그것은 원망도 미움도 아닌 굳은 결심으로 인한 후련함 때문이었다. 진작 이렇게 결정했다면 며느리와도 소원해지지 않았을 테고 마음도 한결 편안했을 것이다.
“어머니, 죄송해요. 그래도요 어머니, 시장 오기 싫다고 하면서도, 비린내 맡기도 싫다고 하면서도요 어머니, 우리 환이 가졌을 때요. 어머님이 구워주셨던 전어가 그렇게 생각나더라고요. 그런데 그 말 한마디를 못하고…. 그런데 어머님 어떻게 알고 전어 보내주셨잖아요. 그때 저 솔직히 눈물 나더라고요.”
“왜 안 섭섭했겠니. 나도 처음에 우리 시어머니가 시장 도맡아 하라고 할 땐 벼락이라도 맞은 듯했는데. 그래도 이 전어 때문에 집 안 나가고 여기에 뿌리내리고 있던 거 아니겠냐.”
오랜만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얼마 만인가 싶다. 시장의 비릿한 생선냄새 대신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적당히 기름기가 낀 전어의 고소한 냄새가 난다.
그곳을 떠나온 것이 벌써 햇수로 30년이 넘었다. 언젠가 다시 찾아오리라 마음먹었던 곳.
유난히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자그마한 나무들과 내 키보다 훌쩍 큰 담장에는 담쟁이넝쿨이 올망졸망 매달려 있었다. 담장 한 편에는 키가 자랄 때마다 그어놓았던 선이 있다. 담장을 뒤로하면 아버지가 시원하게 등목을 하시던 물이 졸졸 흐르는 수돗가가 있다. 아버지가 시멘트를 발라놓으시고는 밟지 말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셨는데 돌아다니다 발자국을 쾅하고 박아놓은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사 가야겠어.
그때에 아버지는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지만 꽤 울림이 있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엄마에게만 말한 이야기였지만 나와 우리 언니도 우리가 곧 이사를 가야 했음을 알았다. 나는 집을 떠난다는 아니, 동네를 떠난다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언니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언니 왜 그래?”
“왜긴, 이 바보야. 우리 이사 간다잖아. 그럼 이 집에서도 못 살고 친구들도 못 만나게 될 거야.”
그랬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아빠와 엄마가 집을 떠나야 했기에 나와 언니도 집을 떠나야 했다. 유난히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우리 집 뒷동네에는 자그마한 동산이 있었다. 동산에 올라가면 졸졸졸 실개천이 흐르고 풀피리 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졸졸졸 실개천이 흐르고 풀피리 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늙은 수탁의 울음소리에 눈을 뜨고 얼룩백이 황소의 게으른 울음소리에 잠이 들었다.
서울에 사는 아이들은 시골 근처에만 오면 똥냄새난다고 코를 틀어막았다. 여기에 지내면서 똥냄새라고 여기지 못했는데, 서울 친구들은 여간 깍쟁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똥냄새가 아니고 고향냄새인 줄도 모르는 서울깍쟁이들이었다.
서울로 이사를 오고 나서부터 한동안은 마당이 넓던 우리 집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고 울고 있었다.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분위기에, 이제는 남의 집이 되어버린 우리 집을 보고 나는 울었다. 꿈에도 잊히지 않는 우리 집이었다.
언젠가 꿈에서 나는 초인종을 눌렀고 그곳에서 나온 정말 그 집 주인에게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우리 집이었어요. 라고 하며 운 기억도 난다. 지금도 가끔 꿈을 꾸지만 꿈속에만 가면 나는 항상 다섯 살 그때의 어린 나로 돌아간다. 지금은 비록 울지는 않지만 길을 한참 헤매다 찾곤 한다.
이제야 왔다. 그곳에 여전히 실개천이 졸졸졸 마을을 휘돌아 나갔고 얼룩백이 황소는 게으르게 울었다. 담쟁이넝쿨은 내 키보다 훌쩍 큰 담장 전체를 휘감았고 여전히 수돗가의 발자국은 깊게 패여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꿈속에서도 잊히지 않았던 곳.
마당 넓은 집에 돌아왔다.
오늘도 수진이는 학교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던 수진이는 병원에서 지내느라 친구들과 뛰어 놀지도 못하고 늘 집안이나 병실에서의 생활이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수진이는 늘 밝고 씩씩한 모습이었지요. 그렇게 매일 병원에서만 지내는 수진이가 안쓰러웠던 엄마는 수진이를 위해 가족여행계획을 세웠습니다. 얼마 전 수진이 친구에게서 가족들과 재미있는 여행을 다녀왔다는 편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수진이는 아직 한 번도 가족들과 제대로 된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의사선생님께서 멀리 외출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수진이의 간곡한 부탁에 못이긴 의사선생님께서도 여행을 허락하였답니다. 그렇게 수진이네 가족은 무주로 첫 가족여행을 떠났습니다. 신나는 마음으로 도착한 수진이는 아픔도 잠시 잊은 채 신나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신나고 재미있는 하루를 보낸 수진이는 기쁜 마음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때마침 환하게 떠오른 달빛은 수진이의 방 창가를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너무도 밝은 달빛에 수진이는 창가 쪽으로 다가갔지요.
그런데 그 때 수진이 눈앞으로 반짝하는 물체가 아른거렸습니다. 수진이는 눈을 비비고 다시금 불빛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불빛이 눈앞에서 반짝였습니다. 수진이는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러자 하나에서 두 개, 그리고 수많은 별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수진이는 하늘에 떠있는 별이 자신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건네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한참동안 불빛을 바라보던 수진이는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엄마에게 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친구들에게도 편지로 별을 눈앞에서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니 수진이의 말을 믿어주는 친구들이 하나도 없었지요.
시간이 흐르고 수진이는 그날의 별빛이 반딧불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요.
수진이는 다시금 반딧불이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치료도 씩씩하게 받고 운동도 열심히 하였지요. 또다시 가족들과 반딧불을 보러 떠난 수진이는 밤이 되기를 기다리며 반딧불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밤하늘에 별만 가득할 뿐 반딧불은 좀처럼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엄마는 날씨가 너무 더워져 반딧불들이 모두 꽁꽁 숨어버린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반딧불을 보지 못해 속상해 하는 수진이에게 엄마는 반딧불을 꼭 닮은 풍등을 건네주었습니다. 풍등에 소원을 담아 하늘높이 띄우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지요.
수진이는 자신이 씩씩하게 치료를 받아 건강을 되찾은 것처럼 반딧불들도 다시 무주의 밤하늘로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래서 풍등에 반딧불에게 보내는 편지도 적었지요.
‘반딧불아. 난 네가 창문에서 나에게 다가왔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 난 네가 정말 밤하늘의 별이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난 네가 그리울 뿐이야. 너를 다시 보기위해 나도 의사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치료도 열심히 받았어. 그래서 이렇게 건강해졌단다.
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해. 보고 싶어 반딧불아.’
수진이의 순수한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밤하늘에 높이 올라간 풍등을 멀리서 보니 반딧불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늘 높이 떠오른 풍등을 닮은 수천 개의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지금도 무주의 밤하늘에는 수진이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반딧불이 밝은 불빛을 반짝이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눌 또 다른 친구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연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거리에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들썩임이 가득했고 언제나 돌아오는 연말연시였지만 사람들은 늘 같은 흥분과 설렘으로 시간을 보냈다. 살짝 취기가 오른 얼굴은 영하의 온도에 아랑곳하지 않듯 붉어있었고 저마다의 한 해를 안주삼아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한테 연락 왔어? 경찰서에서는?”
“아직.”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우리는 엄마를 찾고 있다. 알츠하이머 중기 판정을 받은 후로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탓에 이렇게 가끔씩 집밖을 나가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연말연시라 경찰들도 우리엄마를 찾아주기엔 할 일이 많았는지 자꾸만 집에서 기다리라는 말뿐이다.
“혹시 엄마 거기 가신 거 아니야?”
“어디? 생각나는 곳이라도 있어?”
“왜, 엄마 요 근래 자꾸 기차, 화본역! 그러지 않았어?”
해가 떨어졌어도 한참 전에 떨어져 달빛과 가로등 불빛으로만 시야를 분간해야 했다, 자그마한 대합실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엄마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시계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겨울 막바지라 금방 손발이 얼어붙듯 차가운 날씨였는데 엄마는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엄마의 기억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기에 여기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던 걸까. 치매 초기 때에는 밤이 오는 것이 무섭다며 방에 불도 못 끄게 했던 엄마였다. 엄마가 깊게 잠이 들어서야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마저도 자다 깨면 누가 불을 껐냐며 불호령이었지만, 그랬던 엄마가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간이역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눈빛에 무서움과 두려움은 없었다.
“엄마, 왜 여기와 있어. 기차타고 어디 가려고?”
“기다려. 기다리고 있어.”
“누구를 기다린다는 거야. 오밤중에. 정말 속상해 죽겠어.”
“마중 간다고 했어. 이제 곧 올 거야. 기차소리 들리잖아.”
“무슨 이 시간에 기차소리가 들린다 그래! 정말, 집에가, 빨리 일어나라고!”
“저리가. 마중 간다고 약속해서 기다려야해.”
엄마는 단호하게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추위도 잊은 채 오지 않는 기차를 아니 누군가를 마중가야 한다고 했다. 노인네가 고집만큼이나 힘이 얼마나 센지 두 팔을 힘껏 잡아당겨도 꿈쩍도 안했다.
엄마는 낑낑거리며 거기 남아 있겠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엄마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여 겨우 집으로 모시고 왔다. 집으로 오는 중에도 엄마는 계속 기차소리만 연발했다.
그날이후로 엄마가 또 한 번 사라진 적이 있다. 이번에는 경찰서에도 연락하지 않았다. 엄마의 기억이 머물던 자리로 갔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에도 집에 안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면 어쩌나 하고 화본역으로 달려갔고 엄마는 그 자리에 계셨다.
어쩐지 엄마가 조금 이상했다. 눈빛도 또렷했고 기차고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엄마, 거기서 뭐해?”
“왜 또 왔어. 어련히 집에 안들어갈까봐서.”
“우리엄마 맞네. 저번부터 누구를 그렇게 기다리는 거야? 누구 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어?”
“보고 싶은 사람이라. 보고 싶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
“내 새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어렸을 적 큰오빠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유괴인지 실종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잃어버린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삼십년 째 가슴에 품고 있던 아이를 이제야 마중 나가겠다며 기억을 잃은 그 순간에도 엄마는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그렇게 다섯 살 난 아들을 잃은 엄마는 구슬프게 우셨다. 그리고는 다시금 기차소리가 들린다고 하며 기찻길로 뛰어들었다. 기차는 오지 않았지만 엄마는 자리에 쓰러지셨다.
‘엄마가 마중 갈게. 조금만 기다려.’그렇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셨다.
올해 초, 친구 기원이가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 둘레길 입구로 거처를 옮겼다. 오래된 된 농가주택에 사는데, 이따금 구더기가 출몰한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온몸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야, 온갖 곤충이 득시글거리는데, 살만하냐?”
내 질문에 녀석이 답했다.
“좋아. 행복해. 야, 너 전부 다 때려 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언제든지 와. 재워줄 테니까.”
“빈 몸으로 가도 되냐?”
“당연하지. 아무 것도 필요 없어. 아니다, 올 때 원두 좀 사 와라. 너무 시지 않은 걸로 200g 정도. 갈지 말고 홀빈으로.”
하여간, 구례에 된장남 하나 자리 잡았다.
당분간 잠잘 시간도 없이 바빠서 구례 생각은 아예 접고 있었다. 그런데 기원이가 내려가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나는 본의 아니게 휴식을 맞았다. 까놓고 말하자면 타의에 의해서. ‘이른바 경영악화에 의한 퇴직권유’였다. 앞날이 막막하긴 했는데, 지금까지 일에 시달린 시간이 너무 길어 지금은 무작정 쉬고 싶었다. 나 뭐하지. 사 년 동안 쉴 새 없이 달렸더니 노는 방법도 까먹은 터였다. 그때 갑자기 기원이 녀석이 생각났다. 그래, 일단 여기를 벗어나 보자. 아, 까먹지 말고 원두 사가야지.
서울에서 네 시간 정도를 달려 구례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러 터미널 밖으로 나오니 사방이 불빛하나 없이 깜깜했다. 암, 이래야 정상이지. 네온사인 불빛대신, 하늘에 총총한 별이 보였다. 새삼 ‘내가 지리산 가까이에 오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소속도 없이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구나. 자유인의 몸으로 지리산 입구에 오다니!
그러나 센티했던 기분도 잠시, 나는 구례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멘붕의 순간을 맞았다. 기원이의 집에 가려면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산 밑까지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기원이가 일러준 버스를 탔는데 당최 안내방송이 나오질 않았다. 심지어 버스는 안개 가득한 산 아래를 달려 꼬불꼬불 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겁이 나서 운전석으로 달려갔다.
“아저씨, 연파마을 나오면 얘기 좀 해주세요.”
아저씨는 대답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참을 더 가서야 내릴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기원이 녀석이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녀석을 붙잡고 하소연했다.
“이거 뭐 안내방송도 없고, 어쩌라는 거야! 지리산 미아 되는 줄 알았어! 흐엉엉.”
나의 투정에 기원이가 씽긋 웃었다.
“야, 여긴 서울 아니잖아. 서울 방식은 잊어. 구례에 온 걸 환영한다.”
다음날, 눈을 뜨자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손님 왔다고 기원이 녀석이 밤새 사랑채에 불을 무지막지하게 지핀 모양이었다. 그래도 펄펄 끓는 방에서 땀 좀 뺐더니 찜질방에 다녀온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문을 열자, 차갑고도 청량한 기운이 방으로 들어와 잠이 확 달아났다. 그 때 본채 부엌문이 열리며 기원이가 아침상을 들고 나왔다.
“너 아침 먹고 혼자 화엄사나 갔다 와. 스쿠터 빌려 줄 테니까. 뭐, 종교? 나 성당 다니는 거 알지? 내가 죽겠는데 신이고 뭐고 가릴 때야? 너도 호신불 팔찌 하나 사다 차면 마음이 편해질지도.”
기원이 말만 듣고 무작정 스쿠터에 올라탔다. 세상에. 어제만 해도 도시에서 신세한탄하며 매연 속에서 혼자 얼쩡대고 있었는데, 오늘은 스쿠터를 타고 산길을 오르고 있다. 역시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야.
이 산길은 언제 끝나는 걸까 지루해질 무렵, 화엄사에 들어섰다. 시원한 계곡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문 한 채가 나왔다. 이게 바로 일주문이로군. 생각보다 작고 아담하다. 지리산 화엄사라고 쓰인 현판을 보니 내가 오기는 왔나보다 싶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금강문과 천왕문이 나오고, 비로소 사찰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보에 보물에 천연기념물까지 온갖 귀한 것이 자리하고 있다기에 꽤나 화려할 줄 알았는데, 웬걸. 단정하면서도 질서가 느껴졌다. 여백과 규칙이 공존하는 곳에 들어서니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화엄사는 다른 절과는 다르게 북동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구조다. 지금까지 가본 사찰과는 조금 다른 구조에 어리둥절하며 경내에 들어가니,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찰건물 중의 하나인 대웅전과, 목조건물로는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각황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황전에서 화엄사 전경을 바라보자니 대웅전 뒤로 드러나는 지리산의 능선에 말을 잃고 말았다. 산 속에 사는 영험한 노인이 담배를 피우는 듯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들이 드리워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마구 자아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기가 크다던 각황전 앞 석등, 동·서 오층석탑을 둘러보고, 대웅전 앞 계단에 앉아 잠시 머리를 비웠다. 이렇게 아름답고 고요한 공간에서 시끄럽게 머리를 굴리면 뭐하나. 공간과 자연에 잠시 몸을 맡기고 이곳에 있는 동안은 바람처럼 지내자. 구례는 그렇게 지내는 곳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이니까.
화엄사를 나서기 전, 기원이가 말했던 호신불 팔찌를 사러 갔다. ‘호신불 팔찌 있어요?’라고 물으니, 보살님이 ‘무슨 띠세요?’ 하고 되묻는다.
“80년 원숭이 띠인데요.”
내 말에 보살님은 책자를 하나 들춰보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안 좋은 말이라도 적혀있나 싶어 얼른 들여다보았다.
‘80년 원숭이 띠, △(세모)’
“젊은이, 잘 왔어. 화엄사 호신불 팔찌는 특히 더 영험하다우.”
속는 셈치고 믿어보자 싶어 팔찌를 샀다. 생각보다 비쌌다. 손목에 차고 만지작거리는데, 어라, 나무 알 사이에 틈이 있다. 조심스레 벌려보니 작디작은 불상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아, 정말 이래서 호신불 팔찌구나.’
나는 헛웃음을 치며 스쿠터 시동을 걸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옛날, 어느 마을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잠잘 때, 밥 먹을 때 빼고는 입을 쉬는 일이 없었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우렁찬지 가까이 있으면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하고 다니느냐. 옆집 똥개가 새끼 낳은 일부터 아랫동네 아낙이 바람난 일, 나라님 흉보기, 어제저녁 밥상의 반찬, 죽다 살아난 할아버지 이야기, 조상님 묏자리까지 인간세상 일은 다 관여하고 다녔다. 남의 일이라면 상대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말을 나르는 탓에 피해 본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하루는 마을 사람들이 훈장님 댁에 모여 앉아 불만을 토로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귀가 따가워 일할 수가 없소.”
“그가 안 해도 되는 말을 옮긴 탓에 나는 아직도 마누라와 전쟁 중이라네.”
“이대로는 안 되겠소. 이제부터 우리 모두 그의 얘기를 들어주지 맙시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도 못 듣는 척했다. 들어주는 이가 없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마을을 떠날 결심을 했다.
“좋아. 말을 하면서 전국 팔도를 유랑하는 거야. 내가 직접 들을 사람을 찾아서 이야기하고 다니자.”
그는 그렇게 봇짐을 꾸려 여행을 떠났다. 세상은 넓고 말할 사람은 많았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말을 지어내고 옮기며 행복하게 몇 년을 보냈다.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던 어느 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정동진에 도착하였다.
“풍광이 아름답구나. 신선이 따로 없네. 이제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만 있으면 되겠어.”
이야기할 사람을 찾아 바닷가를 걷던 그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소리를 향해 다가가자, 파도가 바닷가에 선 나무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그래서 토끼가 용왕님에게 뭐라고 했느냐면…….”
파도의 목소리가 신기하여,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파도의 이야기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이야기보다 재미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있었단 말이야? 전부 들어 말하고 다녀야지.’
그는 바위에 쪼그려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파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가 다리가 저렸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슬쩍 다리를 펴다가 솔잎을 밟고 말았다.
“어머나, 깜짝이야.”
솔잎의 소리에 놀란 파도가 저만치 바닷속으로 도망쳤다. 그는 파도를 향해 외쳤다.
“파도야. 도망치지 말고 더 이야기해다오. 뒷내용이 궁금해서 자리를 뜰 수가 없구나.”
하지만 파도는 그를 경계하며 말했다.
“안 돼요. 제가 했던 말은 용궁의 비밀이랍니다. 오로지 해안가의 나무만이 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용궁의 비밀이라니, 더없이 탐나는 이야기였다. 용궁의 비밀을 전국 팔도에 말하고 다닐 생각에 잔뜩 들뜬 그는 파도를 향해 외쳤다.
“내 그 이야기를 위해 기꺼이 나무가 되마.”
그러자 그는 다리가 땅에 박히고 피부는 점점 딱딱해졌다. 손에는 싹이 돋았고 머리칼은 초록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소나무가 되자 입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말하는 데에 눈이 멀어 영영 말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에게 입이 없으니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소나무가 되어 아직도 정동진 해변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입맛이 어쩜 이렇게 토속적이야?
남자친구와 함께 밥을 먹어본 사람들이면 의례적으로 이런 말 한마디씩 꼭 한다. 하긴 금발의 외국인이 청국장, 김치찌개, 불고기 백반을 즐겨먹으니 그럴 만 했다.
그런 것이 외국인에게 갖는 첫 번째 편견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외국인이라고 다 햄버거나 빵을 좋아할 것이다 라는 편견. 남자친구는 처음에 토속적이라는 뜻을 몰라 물은 적이 있다. 한국적이고 좋다는 거라고 이야기 해주니 대번 웃으며 나는 토속적이에요 한다.
남자친구를 처음 만난 곳은 이태원의 한 음식점에서였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것인데 외국인과의 소개팅이라고 해서 나는 일부러 이태원에서 보자고 한 것이다. 일종의 외국인을 위한 내국인의 배려랄까. 처음 본 남자친구의 첫인상은 단정한 금발머리에 피부가 하얀 유럽풍 사람이었다. 평소 영어는 스펙을 쌓으며 만들어진 회화정도였기에 처음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지 고민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처음 보자마자 안녕하세요? 라고 정중히 인사를 하는 그의 모습에 네에. 라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맛도 예상하기 힘든 그리스식 샐러드와 파스타를 주문했다. 그도 평범한 파스타에 쁘띠 피자를 시켰다.
남자친구는 나에게 한국음식 중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외국인에게 이런 질문을 받으니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더 당황스러웠던 건 내 입에서 삼겹살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였다. 삼겹살이 뭐 어떠냐고 생각하겠지만 처음만난 소개팅자리에 그것도 외국인 앞에서 비빔밥이나 김치볶음밥이 아닌 삼겹살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는 반가워하며 자기도 삼겹살 좋아한다며 ‘삼겹살 좋아! 삼겹살 좋아!’라며 서툰 한국말을 했다. 거기에 ‘소주 한잔까지!’를 빼먹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외국인인지 내가 외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우리는 어색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었다.
남자친구는 친구들을 만나러 이태원을 자주 가는 편이었다. 나는 이태원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마 낯선 사람들과 낯선 문화가 혼동되어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남자친구에게 한 적이 있는데 남자친구는 꽤 현명한 답을 했다.
“낯선 사람들과 낯선 문화가 있어서 무섭다고? 왜?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서울 전체가 다 낯선 사람들뿐이고 낯선 문화인데? 난 하나도 무섭지 않아! 오히려 즐거운 걸.”
정답이다. 조금 다르게 생기고 조금은 낯선 문화라고 겁부터 내는 내가 참 바보 같았다.
나는 이태원에서 프랑스식 요리나 커리, 케밥 등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 했다. 남자친구는 나를 많이 배려했고 이태원 맛집 지도라며 귀엽게 그림을 그려 온 적도 있다.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저 멀리 한 카페에서 남자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뭐 하고 있었어?”
“응, 오늘 파티가 있다고 해서 재미있는 옷들 좀 같이 구경하려고.”
“파티? 우와 재미있겠다. 할로윈 같은 건가?”
역시 외국문화 집결지답게 각 나라의 전통의상이나 만화 캐릭터들의 의상이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남자친구의 나라 스위스의 전통의상을 골랐다. 남자친구는 알프스 소녀처럼 귀엽다고 했다.
의상과 액세서리를 치장하고 간 파티자리엔 역시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였다. 세계 갖가지 맛있는 음식들이 놓여있었고 술도 종류별로 있었다. 언어와 생김새가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였지만 이질감이나 거리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배려하면서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고 궁금증도 많아졌다.
이태원, 역시 자유로움 속에 정돈된 질서가 숨어있는 곳이다.
희뿌연 듯 하면서도 선명하고 어질러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깨끗한 곳. 언제나 또 언제나 새로운 곳, 그곳은 이태원이다.
이태원 프리덤!
“아, 오빠! 이번에는 진짜 맛집이라고 했잖아!”
한바탕 화를 내려다 오빠의 허탈한 표정을 보고 그만두었다. 그래, 또 허탕이었다. 국밥 한 그릇 먹자고 부산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오빠도 나도 날이 갈수록 짜증만 더해갔다. 사건의 시작은 한 달 전, 부산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갔다가 그 유명한 서면 돼지국밥을 맛보고 만 것이었다.
오빠의 제대 기념으로 남매끼리 떠났던 기차 여행. 하지만 여행 초반부터 예산을 초과해버린 탓에 하루 종일 차를 타고 이동하다 내려서 사진만 찍는 스파르타식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 부산의 명소란 명소는 다 돌았지만, 배가 고프고 지치니 즐겁지가 않았다.
그 때 내가 묘안을 내 놓았다. 서면에 살고 계시는 외할아버지가 생각 난 것이다. 외할아버지를 깜짝 방문한다면 끼니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용돈도 넉넉히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먼저 연락을 드려 볼 것을 그랬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보는 손주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정도로 냉장고를 채워 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곤란해 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우리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할아버지는 고민 끝에 우리를 서면 시장으로 데리고 가셨다. 친구 분께서 하시는 유명한 국밥 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구, 그 꼬맹이들이 벌써 이만큼 큰 거여?”
처음 보는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셔서 반갑게 우리의 손을 잡으셨다. 오빠도 나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친구 분께서는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에는 할아버지 댁의 바로 옆집에 살고 계셨다고 한다. 대여섯 명의 직원들이 있는데도, 그 할머니께서는 우리에게 손수 국밥 두 그릇을 말아다 주셨다.
“순자 그 할망구가 지금까지 살아만 있었어도 이 양반이 여기까지 걸음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여. 그 할망구는 뭐한다고 그렇게 일찍 가 버렸대.”
넋두리 반, 국밥 반이었다. 그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와 절친한 사이셨던 모양이었다. 친손자를 보듯 따뜻한 눈길에 마음이 참 편해졌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때 먹은 그 국밥이 정말이지 너무도 맛이 있었다.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서울로 돌아온 오빠와 나는 그 때 그 맛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에 온 서울의 돼지국밥 집을 다 찾아다녔지만, 번번이 허탕이었다.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고 다대기와 부추를 넣는 것은 물론 고기 위에 새우젓까지 올려 정석대로 먹었지만, 부산에서 먹은 그 맛이 나지를 않았다.
엄마는 기대에 가득 찬 모습으로 집을 나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실망 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오는 우리들의 모습이 퍽이나 재미있으신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엉뚱한 일을 많이 벌이기로 소문난 우리 남매지만, 이번엔 유독 별나다고 하셨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빠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오늘 밤 고백할게 너와 함께 돼지국밥을 먹고 싶다 부산으로 떠나자’라는 가사의 노래까지 틀고 있었다. 정말 부산으로 가야만 그 돼지국밥을 다시 먹을 수 있는 걸까. 국밥이라 우습게 봤는데 도무지 그 맛을 다시 볼 수가 없으니, 괜한 집착만 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밤 엄마는 새벽 내내 부엌을 들락거리셨고,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식탁 위에 돼지국밥이 차려져 있었다. 아마 밤새 돼지 뼈를 삶으신 모양이었다. 집에서 돼지국밥이라니, 이게 웬 일인가 했더니 엄마가 나고 자라신 곳이 바로 부산이었다.
“할머니가 가르쳐 주신 지 하도 오래 돼서, 제 맛이 나려나 모르겠네.”
엄마는 멋쩍으신 듯 웃으셨지만, 우리의 칭찬을 은근히 기대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오빠와 나는 한 숟갈을 떠먹고는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입을 모아 말했다.
“우리가 찾던 그 맛이네.”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가 만든 돼지국밥의 맛보다 부산에서 먹은 돼지국밥이 훨씬 더 맛있었다. 그런데 돼지 뼈를 삶고 옮기다 데셨는지 엄마의 검지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돼지국밥 찾기를 그만두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진부한 말처럼, 맛의 비결은 역시 사랑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