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후배 한 명이 미리 주는 생일 선물이라며 김광석의 베스트 앨범 한 장을 건네 왔다. <서른 즈음에>라는 곡명에 형광펜으로 체크가 되어 있는 것을 보니 나를 곯리려 작정을 한 것이 분명했다. 괘씸하기는 했지만, 명곡은 명곡이었다. 신세대라고 하기에는 구세대이고, 구세대라고 하기에는 신세대인 어정쩡한 나이가 된 나는 이수영이나 성시경의 노래보다는 김광석의 노래를 더 사랑했다.
헤어진 전 여자 친구이기도 한 후배는 ‘술 좀 줄이시고요.’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또 마침 소주 안주로 제일인 것이 김광석의 노래라 하지 않았는가.
결국 과음을 한 탓에 다음 날 수업에 나가지 않자, 후배가 뺨을 붉히며 숙취 해소 음료 하나를 건네 왔다. 후배의 복잡한 표정에서, 그 애가 못다 한 말들이 읽혔다. ‘선배님, 장난 치고는 좀 심했죠.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하실 걸 모르는 게 아닌데. 기분 전환이나 하시라고 드린 선물이었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하고 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말 대신, 뜬금없이 대구에 있다는 김광석 길에 함께 가주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술이 덜 깨서일까, 아니면 김광석의 달콤하고도 쌉쌀한 노래들을 어제 하루 종일 들어서였을까. 아차 하는 마음에 미안하다고 말하려 하는데, 후배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가 다음 수업이 있다며 인사를 하고 강의실을 나간 뒤에도, 나는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후회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술은, 정말로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헤어진 후로 몇 달이나,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었다. 그러던 와중에 선물로 받은 것이 김광석의 앨범이요, 몇 달 만에 들어보는 따뜻한 말이 술을 좀 줄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광석의 노래가 내 방을 가득 채우니 술이 고픈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에서 <이등병의 편지>를 거쳐 타이틀곡인 <변해가네>까지는 그럭저럭 견뎠지만, <서른 즈음에>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냉장고를 열고 소주병을 꺼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 농담처럼, 내게도 서른이 왔다. 철부지 새내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몇 번의 작은 성공과 몇 번의 연애, 그리고 몇 번의 쓰린 실패 끝에 내게도 서른이 오고야 만 것이다. 잦은 휴학에, 아직 대학 졸업장도 받지 못했는데 말이다.
안주 없이 소주잔을 비우며 몇 방울의 눈물을 떨궜던 것 같기도 하다. 서른이라는 막막한 숫자 앞에, 그리고 서른이 되도록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거울 앞의 내 모습에 말이다. 내 인생의 역할 모델로 자리매김하고 계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며, 내 안의 어떤 것이 같이 죽어버렸다. 울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아버지의 시신을 보았을 때, 영영 무너지지 않을 아버지의 철옹성 같던 어깨가 실은 작은 새처럼 여린 것이었음을 알게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가장 크게 믿던 사람이 그렇게 한 순간에 한 줌의 재가 되었다.
“현석아, 네가 이제 우리 집의 기둥이여.”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이 싫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머니와 여동생의 버팀목 역할을 맡아야 했고, 그 자리가 두려워 계속 뒷걸음질만을 치다가 끝내 주저 앉아버리고야 말았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다가온 주말에 나는 정말로 후배와, 아니 내 전 여자 친구와 함께 대구행 기차를 탔다. 여전히 조금은 어색한 사이였기에 애초에 많은 대화가 오가지도 않았고, 삼십 분이 채 되지 않아 간간히 오가던 대화마저 완전히 끊겨 버렸다. 서로 감정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연애는 이미 지난 일이었다.
그 나른한 봄의 정적 속에서, 나는 잊고 있었던 풍경 하나를 기억해 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아버지의 서른 즈음에 있었던 일을 말이다. 만취하여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김광석의 노래를 열창하셨다. 다른 어떤 노래도 아닌, <서른 즈음에>를. 그것도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라는 부분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부르셨다. 비어가던 서른 살 아버지의 가슴을 다시 차오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툭, 하고 내 어깨 위로 고개 하나가 기울었다. 그 애가 봄기운에 취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서른 즈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여전히 이불속에서 꿈틀거렸다. 아침밥은 칼같이 먹어왔던 생활습관 때문에 우리 집 아침 식사는 늘 6시 반이었다. 평소와 같이 6시면 주방에 있어야 할 아내가 어쩐 일인지 오늘은 여태 방안에 있다. 주말 아침이라 그런가 싶어 내버려 두었으나 시계바늘이 7시를 막 넘어가니 배도 고프고 해서 아내를 깨우기로 했다.
“이봐, 이제 그만 일어나. 어? 지금 몇 신줄 알어? 나 배고파.”
“아이 참. 당신은, 밥통에 밥 있고 냉장고에 반찬 있는데 그것도 하나 못 꺼내 먹어서 이러는 거예요? 나 좀 쉬자고요. 제에발.”
“여태 누워있었으면 됐지 뭘 더 누워있으려고해? 빨리 밥 줘,”
“몸살이 왔는지 지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오늘 아침만 좀 넘어가자고요.”
아내는 다시 이불을 똘똘 말고 애벌레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사람이 무슨 몸살이냐고 물어보려다 괜히 불똥이 튈까 말없이 냉장고로 향했다. 아내말대로 밥통에는 밥이 있고 냉장고에는 반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주말이라 애들도 다 약속 있다고 나가버리고 아내와 단 둘이 있는 집에서 혼자 아침을 먹으려니 괜히 서글퍼졌다.
꺼내던 반찬통을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고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봐. 몸살 났을 땐 낙지가 최고야, 낙지 사줄 테니까 먹으러 가자고.”
“당신이 웬일이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큰일 난다던데 아픈 게 내가 아니라 당신 아니야?”
“이 사람이, 사준대도 뭐라 그래? 싫으면 관둬.”
“누가 싫대요? 가요. 가자고요.”
아내는 힘이 없다더니 목포로 내려가는 내내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멋이라곤 하나 없던 양반이 오늘은 왜 이러냐면서 싱글벙글이다. 평소 무뚝뚝한 성격에 아내에게 살가운 말 한 번 못하긴 했어도 무신경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아내는 참 별 거 아닌 것에 감동스러워했다.
채 정돈이 안 된 옛 부두를 지나 재래시장이 줄줄이 늘어선 항구를 찾으니 바다 냄새와 생선의 비릿한 냄새가 풍겨와 코끝을 간질였다.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시원했고 낯선 항구도시는 언제나처럼 반가웠다.
바닥에 야트막히 물이 고여 있고 장화를 신은 장사꾼들은 싱싱한 물건이 많이 들어왔다며 손짓했다.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이 세발낙지를 쓱 둘러보는데 주인이 흥정을 걸어왔다.
"뭣 찾으신다요?"
"저거, 저 세발낙지는 얼마요?"
"아 세발낙지 좋지요. 6마리에 3만원인데 특별히 큰 놈으로다 7마리 넣어드릴랑게 여서 드시고 가시쇼.”
"비싸네."
"뭐시 비싸다고 했싼다요? 크기는 이래봬도 한 마리만 자시면 힘이 벌떡 벌떡 솟는 당게요."
"한마리만 더 주면 안 될까요?"
"아따 사장님도 차암. 에이, 그렇게 허요."
흥정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니 매콤한 양념장에 돌돌 말은 낙지 호롱구이와 갈낙탕이 차례로 나왔다. 주인의 걸쭉하고 호탕한 말만큼이나 음식도 푸짐했다.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린 호롱구이를 베어 물던 아내는 음식을 채 삼키기도 전에 실웃음을 터트렸다.
“풋. 당신 오늘 이상하네.”
“낙지 먹다 말고 뭐가 또.”
“당신이 흥정을 다하고. 내가 알던 사람 맞나 싶어서. 크큭”
“싱겁긴. 식기 전에 얼른 먹어. 한 마리만 먹어도 힘이 불끈 솟는다는데 어때, 기별이 좀 와?”
“글쎄~ 한 마리 더 먹어봐야 알겠는데?”
아내가 배시시 웃는다. 세발낙지가 힘만 불끈 솟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부간의 사랑도 불끈 솟게 만드는 힘이 있나보다.
자영업을 하기 때문에 평소 쉽게 가게 문을 닫을 수 없었던 남자. 그래서 주기적으로 떠나는 휴가도 한번 제대로 떠나본 일이 없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3년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남자는 지난 3년간 아내와 아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이게 다 처자식을 위해 뼈 빠지게 버는 돈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미안하긴 했어도 조금은 당당했다. 그런 남편을 아내도 적잖이 이해해주는 눈치였다.
생전 가게로 전화를 안 하는 아내인데 웬일인지 가게로 다 전화를 했다. 아내의 말이 빨랐고 약간은 울먹였다.
“전화가 왔었어요. 방금. 민준이 담임선생님한테.”
“담임선생님한테? 왜? 민준이 뭐 사고친거야?”
“아, 아니. 학교에서 청소년 우울증 상담검사 같은 걸 받았는데. 결과가….”
평소 전화는커녕 부모님 모시고 오라는 소리 한번 듣지 않았던 터라 심장이 덜컹했다. 차라리 친구와 싸우거나 숙제를 안 해왔다는 전화였으면 좋았을 걸. 담임선생님의 전화는 뜻밖에도 아이가 학교에서 받은 청소년 우울증에서 우울증 수치가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좀 더 자세한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전화였다.
우울증. 학교 다니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나? 아니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관계가 좋지 않나? 그런 것도 아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담임선생님께선 아이들과의 문제는 없어 보인다고 했으니까.
누구를 위한 3년의 시간이었나 생각한다. 남자는 가장으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는데 아이는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었나보다.
모처럼 가게 문을 닫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월성계곡으로 떠났다. 병원을 가보기 전 일단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담임선생님의 소견이었다. 아이는 즐거워보였다.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니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이에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정 상태는 어떤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방송을 타서인지 계곡에는 때 늦은 피서객이 몰려들었다. 아빠와 즐겁게 물놀이를 하는 아이도 보였고 튜브를 타고 물살을 즐기는 아이들도 보였다. 멀리서 고기 굽는 냄새와 옥수수를 먹는 아이들이 보이며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내 아이의 머릿속도 아니 마음속도 한가롭다고 느껴지면 좋을 텐데 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물은 시리도록 맑았고 푸른빛이 맴도는 풍경은 봄의 화사함만큼이나 밝았다. 저마다 하하 호호 웃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방갈로 마다 퍼져나갔다.
하루를 아이와 꼬박 즐겁게 놀아본 것이 얼마만인지 남자의 머릿속은 금세 까마득해졌다. 내심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해맑게 방갈로를 뛰어다녔고 여느 때와 같이 즐거워보였다. 은근슬쩍 학교에서의 생활을 물어보기 좋은 시간이었다.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들어? 친구들과 사이는 어때? 공부하는 것이 지치니?”
“아빠,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빨리 대답해봐. 응?”
“음. 아빠! 우리 다음에는 또 어디가요?”
약간은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큰기러기의 보드라운 깃털 사이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이제 가을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강가는 아직 활기차다. 논병아리 가족들이 줄지어 쪼르르 헤엄치고 있고 청둥오리들도 무리지어 강가를 누볐다. 강가에서 유일하게 혼자인 희망이는 강가를 빙빙 돌며 헤엄쳤다.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희망이는 날개를 괜히 접었다 폈다 하며 빨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희망이는 큰기러기이다. 일찍이 가족들과 이별한 희망이는 강가에서 늘 외롭게 떠돌았다. 간혹 친구들을 사귀기 하였지만 그런 친구들은 금세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그래서 희망이는 더욱 외로움에 자신을 가두기도 하였다.
별이 쏟아질 듯한 밤이 오자 희망이는 샛노란 달님을 보며 어김없이 가족들을 그리워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찬바람이 제법 쌀쌀해졌고 강가를 누비던 논병아리 가족들과 청둥오리도 서로 몸을 맞대며 추위를 견뎠다. 이제 겨울이 온 것이다. 외로운 희망이는 몸을 맞댈 가족도, 친구들도 없었다. 또 홀로 날개를 펄럭이며 강가를 빙빙 돌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그때 한 무리의 오리 떼들이 날아왔다. 언뜻 봐도 어마어마한 수의 오리 떼들이 날개를 펼치며 강가로 내려왔다. 희망이도 오리 떼들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수는 처음이었다. 큰 눈이 더욱 휘둥그레져 오리 떼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많은 오리의 무리에서 유난히 초록색의 멋진 머리를 가진 오리 한 마리가 희망이에게 다가왔다. 희망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고 초록색의 머리를 가진 오리는 희망이에게 자신은 가창오리라고 소개를 했다. 희망이도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고 가창오리는 잘 부탁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늘 홀로 강가를 헤엄치던 희망이는 무리지어 헤엄치는 가창오리가 부러웠다. 일제히 하늘을 검게 수놓는 모습도 부러웠다. 그렇지만 가창오리들은 봄이 지나면 다시 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혼자가 될까 두려운 희망이는 가창오리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또다시 상처를 받을까 봐 가창오리 주위만 맴돌 뿐 가까이 가지 못했다. 그렇게 선뜻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희망이를 위해 가창오리는 갈대를 꺾어 피리도 불어주고 예쁜 꽃을 날개에 달아주기도 하였다. 어느새 마음을 열게 된 희망이는 가창오리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멋지게 하늘을 날기도 하고 누가 더 빨리 헤엄칠 수 있는지 내기도 하였다. 붉은 노을이 스르르 하늘을 물들일 때 일제히 하늘을 수놓는 가창오리의 춤사위를 부러워하던 희망이도 파르르 날아올라 그 무리에 슬쩍 껴보기도 하였다. 시간이 흘러 못 보던 텃세들과 나그네새들이 날아와 친구가 되기도 하였다.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던 희망이었지만 가창오리와 함께 지내면서 먼저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밀기도 하였다.
그렇게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아니, 봄의 마지막이 왔다. 이제 가창오리들은 다시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할 때였다. 희망이는 슬퍼졌다. 가창오리의 주변을 빙빙 맴돌 뿐이었다. 가창오리는 함께 떠나자고 했지만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희망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떠나야 할 때가 왔다. 코끝이 찡해지고 날개가 떨려왔지만 희망이는 입을 꾹 다물며 떨어지려는 눈물을 삼켰다. 어젯밤 달을 보며 가창오리가 떠날 때 울지 않겠다고 가족들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웃으며 가장 멋진 모습으로 떠나보내 주겠노라고 다짐을 한 희망이는 가창오리에게 잎사귀로 만든 멋진 나비넥타이를 선물하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가창오리도 희망이와의 추억을 잊지 않겠다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라는 인사를 했다.
가창오리는 힘차게 날아올랐다. 가창오리가 날아오르자 나머지 오리들도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희망이를 위한 마지막 군무를 보였다. 붉게 물든 하늘위로 검은 가창오리 무리가 높게 날아올랐다가 아래로 내려오더니 희망이의 모습을 하늘에 수놓았다.
“안녕! 희망아, 가을이 되면 다시 돌아올게. 그때까지 건강해야 해!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희망이도 하늘을 보며 있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가창오리 떼들이 먼 길을 떠나고 나서야 희망이는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잘 가! 가창오리야! 보고 싶을 거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희망이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가창오리와 다시 만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창오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희망이의 아름다운 날들은 계속될 것이다.
서울에 취직이 결정되어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 기뻐하는 내 곁에서 어머니는 ‘왜 굳이 서울이냐’는 말만을 반복하셨다. 취업난이 얼마나 심각한데. 엄마가 뭘 몰라서 그렇다며 짜증을 내는 통에, 어머니와 나의 이별은 그리 아름다운 모양새가 아니었다.
이삿짐을 싸고 있는 내게 어머니가 책 한 권을 건네셨다. 귀퉁이가 다 닳고 너덜너덜해진 책. 우리 집처럼, 낡고 또 낡았다.
“이런 건 또 왜요. 가져가 봐야 읽지도 않을 텐데.”
“너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인데 기억 안 나니? 어젯밤에 읽어봤는데 재미있더라. 일하다 지치면 한 번씩 들여다 봐.”
나는 그 책을 꼬박 오 년이 지난 오늘에야 다시 발견했다. 오 년 동안 쉼 없이 일한 결과, 직급도 연봉도 높아졌다. 직장에서 사십 분이 걸리는 대학가의 자취방에서 시작해서, 이제는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 떨어진 원룸 촌에 자리를 잡았다. 집에 가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자주 전화를 드리지도 않았다. 먼 지방의 지역 번호를 누르는 것이 싫었다. 이유는 그 뿐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행복이라는 것을 좀처럼 느낄 수가 없었다. 아침 일곱 시 반에 일어나 회사에 가서, 하루 종일 엇비슷한 서류들 사이에서 머리를 싸맸다. 나를 괴롭히는 상사도 없었고, 딱히 사이가 나쁘다 할 만한 동료들도 없었으며, 매일 점심을 같이 먹을 정도로 친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바쁘게 사는 것이 좋았다. 얼굴을 본 지도 몇 년이 지난 친구들을 굳이 불러내어 맥주를 한 잔 하는 것이 귀찮았다. 통장에 쌓여가는 잔고들을 확인하며, 미래를 꿈꾸는 것이 좋았다.
헌데 그 미래라는 것이 참 묘했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좋은 사람을 만나, 아이들을 낳고 싶었다. 그러는 중에는 내 집을 가지기 위해 일을 할 것이다. 아침에는 조금 더 일찍 일어나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저녁에는 가계부를 정리할 것이다.
하루의 끝, 자진해서 야근을 하고 돌아오면 빈 부엌에서 무엇을 먹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뜨거운 물로 삼십 분도 넘게 샤워를 했다. 고단함이라는 것이 쉽게 씻겨 나가지 않았다.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러 본 지도 십 년이 넘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신 이후로 혼자 나를 키워 오셨다. 집안 살림이 넉넉한 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나날이 말라가셨다. 하지만 집에 웃음이 끊겼던 기억도 없다. 낡고 초라한 반지하의 빌라였지만, 어머니는 매일 내가 좋아하는 반찬 한 가지씩을 상에 올려 주셨다. 먼 곳에 가지는 못했지만, 저녁이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섰다. 길거리의 이름 모를 꽃들을 들여다보며 함께 웃었다. 컴퓨터를 사 주지는 못하셨지만, 헌 책방에서 한 달에 한두 권씩은 꼭 책을 사다 주셨다.
점심 즈음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와 내가 함께 살던 반지하의 빌라가 헐린다고 했다. 나는 ‘받은 돈으로 새 집을 구하면 되지. 혼자 살기에는 어차피 크잖아.’라고 대꾸하고 전화를 끊었었다. 그런데 그 낡은 책을 보자 문득, 그 구질구질한 집에서의 웃음소리가 그리워 진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첫 장을 펼쳤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라는 투박한 제목을 가진 그 책은, 어머니가 사다 주셨던 책 중의 한 권이었다. 땅보다 갯벌이 더 많은 바닷가였던 괭이부리말에는 고양이 섬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섬이 있었다고 한다. 갯벌도, 고양이섬도 바다가 메워지며 흔적을 감췄고, ‘괭이부리말’이라는 이름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고 한다.
책을 넘기며 나는 혼자 눈물을 훔쳤다. 책 속의 명희는 괭이부리말에서의 기억을 모두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는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명희가 10층짜리 아파트를 떠나 여전히 가난한 동네인 괭이부리말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도 명희는 지금 행복했다. 다 낡아빠진 숙자네 집 문 앞에 선 지금이 엘리베이터 자동문 앞에 섰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꼈다. 명희는 이제서야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책의 한 구절을 소리 내어 읽으며,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점점 기력이 쇠해지면서 말수도 적어지셨다. 동네 경로당이라도 다시시면 좋으련만 며칠 나가시더니 그마저도 발길을 끊으셨다. 말이 경로당이었지 할머니보다 연배가 훨씬 적은 젊은 할머니들의 등쌀에 외부인 취급을 받으신 할머니는 그날로 줄곧 집안에만 계신다.
할머니는 건넌방도 거실도 아닌 베란다에 보금자리를 만드셨다. 구부정한 허리에 다리를 곧게 뻗으시고는 베란다 발코니에서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식사를 하거나 화장실에 용무를 보러 가시는 시간 이외에는 대부분 베란다에 계셨다. 베란다와 할머니는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에게 제법 어울리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화초라도 가꿔보는 것은 어떠냐고 했지만 금방 죽어버릴 걸 뭐 하러 사오냐며 그만 두라고 했다.
할머니는 줄곧 시골에서 사셨다. 꽃다운 나이에 시집온 그 동네에서 알콩달콩 살림을 꾸리며 십수 년의 세월을 보내셨다. 할머니 댁 앞마당에는 작은 개울가와 원두막이 있어 여름이면 꼭 할머니 댁에서 하루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작은 개울가에서 발도 담그고 빨래도 하던 공간을 70여 년 만에 떠나 서울로 올라오신 거다. 얼마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우리 집으로 할머니를 모셔왔다. 할머니는 한사코 거절하였지만 혼자 시골에서 적적하실 뿐더러 몸도 편치 않으셔서 안 된다며 엄마의 고집이 할머니 고집을 꺾었다. 서울로 올라오신 할머니는 서울도 참 많이 변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점점 더 위태로워지셨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에게 산책이라도 다녀오시라고 했지만 말뿐이었다. 엄마도 할머니에게 최선을 다하고는 있었지만 그 무엇도 할머니의 무언가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베란다에 있는 시간도 더 길어지셨다.
“베란다에 도대체 뭐가 있길래 하루 종일 거기만 쳐다보고 있느냐고. 누가 보면 억지로 데려가 가둬두는 줄 알겠어. 우리 집 신고 당하면 다 엄마 때문인 줄 알아.”
“그냥 답답해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말라 안하나.”
“답답하면 산책을 나가던가. 왜 집밖을 안 나가는데 같이 쇼핑가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 외식을 하러 나가자고해도 싫다 그러고. 노인네가 고집은 또 왜 이렇게 센지.”
엄마는 속상한 마음을 풀어놓았다. 그럴수록 할머니는 더욱 베란다 가까이에 붙었다. 나는 할머니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
할머니를 모시고 청계천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변해버린 서울이 두려워 집 밖을 나가기가 무서우셨던 거다. 늙어버린 당신과 함께한 고향을 두고 모든 것이 낯선 동네에서의 두려움은 할머니를 베란다로 내 몰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금자리에서 위태로운 삶을 버텨가던 할머니는 결국 시골집의 작은 개울이 그리우신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병원 검진 때문에 집밖을 나오셔야 하는 날, 나는 진료를 받고 할머니를 청계천으로 모시고 갔다. 아이들은 발을 담그고 하하 호호 웃으며 놀고 있었고 청계천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할머니는 한참 동안 청계천을 바라보셨다.
막혀있던 물줄기가 시원하게 뻗어나가듯 청계천을 흐르는 물줄기가 제법 거셌다. 잘 꾸며놓은 조형물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할머니는 서울 한 가운데에서 시골 앞 개울가를 만난 듯 하셨다. 반가움에 두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할머니, 다리 안 아프셔요? 이제 그만 갈까?”“조금만 더 있다 가자꾸나. 조금만.”
“서울도 많이 바뀌었지요? 옛날에는 여기가 다 시멘트 바닥이었는데. 몰라보게 바뀌었어. 이렇게 꾸며놓으니 좋지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시골 개울가처럼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거나 멱을 감지는 않았지만 할머니 눈에는 검게 그을린 개구쟁이 아이들이 수업이 끝나고 미꾸라지를 잡는 모습으로 보이는 듯했다. 청계천 8경 중에서도 할머니는 5경에서 가장 오래 머물러 계셨다. 5경은 빨래터를 재연한 공간으로 아마 할머니의 집 앞 개울을 가장 많이 닮은 곳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눈시울이 조금은 붉어졌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매만지셨다.
청계천에 다녀오신 후로 할머니는 기력을 조금씩 되찾으셨다. 베란다에 나가 계시는 시간도 줄고 간간히 산책도 다녀오셨다.
할머니의 시간은 앞으로도 흐를 것이고 청계천의 물도 이제는 마르지 않고 흐를 것이다. 언제나 언제나.
팔이 아파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을 하면 딱 떠오르는 건 높고 맑은 가을 하늘인데, 왠지 며칠 째 날씨가 우중충했다. 그래도 바람에 단풍잎 한 장이 날려 오는 것을 보니 가을은 가을이다.
이직을 앞두고 몇 달 간, 일을 쉬게 된 나는 이 며칠 동안 편지를 썼다. 마치 동물원의 오래 된 노래처럼, 그리고 동물원의 노래를 들으면서 말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바로 취업을 해서 쉴 새 없이 일만 한 지 어느덧 삼 년. 친구들은 다 서울에 취업을 했지만, 나는 이사한 집 근처에 취직을 했다. 일을 하랴 저축을 하랴 주말에는 부쩍 건강이 안 좋아지신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랴,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친구들은 잘도 놀러 다니는데 나만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내 나름대로 장녀의 책임을 다 하고 있는 것이 뿌듯하기도 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며 속 얘기를 털어놓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만나지를 못하다 보니 연락이 뜸해지는 것도 당연지사. 서운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끔, 간절곶에서 보았던 소망 우체통이 생각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해가 빨리 뜨는 곳이라 해서 찾아간 간절곶이었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소망 우체통이었다. 사람 키보다 훨씬 더 큰 그 우체통을 보며 나는, 저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담겨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머릿속에 차 있는 이 그리움들을 모두 보내려면, 역시 그 우체통에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문구점에 가서 편지지 몇 묶음과 펜 한 세트를 산 것이었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조우는 특별해야 했다. 휴대전화를 통해 께적께적 내 소식을 알리고 싶지 않음이 첫째요, 인간관계에 조금은 진지해져 보고 싶은 마음이 둘째였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의 네 권의 졸업앨범을 모두 펼치고,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를 편지봉투에 옮겨 적었다.
초등학교 때의 친구가 세 명, 중학교 때의 친구가 다섯 명, 고등학교 때의 친구가 열한 명, 그리고 대학교 때의 친구가 열일곱 명. 손을 꼽아 몇 명인지를 세며, 세월이 흐르면 잊혀 진다는 게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유경이에게. 안녕, 나 신윤지야. 나이를 두 배는 먹었으니까 내가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사학년 때 네 짝이었던, 빨간 실내화 가방 주인 말이야…….’
‘민지에게. 안녕, 나 윤지야. 난 아직도 우리 학교 앞에 있던 떡볶이 아주머니의 얼굴이 기억 나. 혹시 아직도 그 가게가 있니? 너랑 다시 그 곳에 가고 싶다. 내 사춘기 때의 기억들은 다 거기에 있어…….’
‘윤수에게. 안녕, 나 윤지! 잘 지내지? 고등학생 때에는 그렇게 날 쫓아다니더니,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대학 가서 예쁜 여자 친구라도 생겼나봐? 하긴, 지금 생각해보니 너도 꽤 인기가 있었지. 하지만 그래도 넌 내 친구야, 그냥 친구. 네 동생도 이제 대학생이겠구나. 어렸을 때 진짜 귀여웠는데…….’
‘현경이에게. 야! 어떻게 이 년 동안 연락이 없을 수가 있어? 얼굴도 잊어버리겠다야. 내가 그 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기나 해? 나 이제 쉬어. 그러니까 이거 받으면 빨리 전화 해. 내가 이미 너희 집 앞에 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긴장하고. 아, 그리고 언제 한 번 같이 윤 교수님 뵈러 가자. 윤 교수님이 우리 진짜 예뻐하셨잖아. 설마 벌써 다른 애제자가 생기신 건 아니겠지? 그럼 진짜 서운할 것 같아…….’
편지를 쓰며 나는 예상보다 많은 후회를 했고, 예상보다 많은 그리움을 느꼈다. 편지지 한 장씩에 꾹꾹 눌러 담은 기억들만큼이나 말이다. 마지막 편지에 마침표를 찍으며, 나는 대나무밭에서 목청껏 소리를 내지른 이발사처럼 후련해졌다. 내 앞에, 못 다한 이야기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봉투 하나하나를 밀봉해가는 동안, 흐린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내일은 소망 우체통에 간다.
볕이 좋은 주말 오후에도 체육관은 기합소리와 땀 냄새로 그득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가슴에 태극마크 하나씩 달고 저마다의 목적을 위해 운동을 한다. 하나같이 종목들과 운동을 하는 이유는 다 다르지만 ‘국가대표’라는 직분은 같기에 오늘도 기합소리가 새어나온다. 그들은 힘이 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고 몸이 뒤틀리는 고통을 웃음으로 넘긴다. 4년의 기다림을 알기에 그들은 참고 또 참는다. 누군가는 메달이라는 상징물 혹은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큰 세계적 이슈로 보겠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도 나라의 미래일수도 또 다른 의미에서는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 쓰러지겠어. 메달 따고 싶어 하는 맘은 나도 알겠는데 그래도 컨디션 조절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 몰라?”
“나 메달 따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
“메달 따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몸을 힘들게 해. 좀 쉬었다 하자.”
한준은 몸에 땀이 비 오듯 흘러 운동복이 흠뻑 젖었다. 파트너 희진의 만류에 겨우 기구를 내려놓았다.
미지근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한준에게 희진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 때문에 그렇지?”
“무슨 소리야 그게.”
“한준이 너, 어머니 찾겠다고 그러는 거잖아. 메달 따서 당당하게 찾아뵈려고. 아니야?”
한준의 부모님은 한준이 12살이 되던 해에 각자의 삶을 살기로 하였고 한준은 아버지를 따라가야 했다. 그 이후로 한준은 어머니를 자주 볼 수 없었다. 20살이 되던 해에 국가대표로 선발되면서 태릉선수촌에 들어왔다. 그 이후로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한준은 메달을 따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었을 때 당당한 모습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가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주말이나 휴일에도 오로지 운동만 했다. 나라를 위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어머니 하나만을 위한 피땀 어린 노력이었다.
“배고프지 않아? 오늘은 주말이고 사람도 별로 없으니까 우리 나가서 먹자. 외식하자 외식.”
생각 없다는 한준을 억지로 끌고 나왔다. 체육관을 벗어나기만 했을 뿐인데 왠지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바깥바람을 만끽하며 걷는 희진과 달리 바닥만 보고 걷던 한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바로 앞에는 낡은 구두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아주머니 한분이 눈물이 그렁한 채로 한준 앞에 서있었다.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았지만 한준의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준아.”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돌아가세요.”
“저기, 한준아. 밥. 밥은 먹었니? 안 먹었으면 점심만 같이 먹고 가면 안 될까?”
둘의 관계를 알아차린 희진이 순발력을 발휘해야 했던 순간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한준이 파트너 김희진이라고 합니다. 한준이 어머님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헤헤. 아, 마침 저희도 점심 먹으러 나가려던 참인데 제가 오늘 운동스케쥴이 있었던 걸 깜빡했지 뭐에요? 그래서 그런데 두 분 이서 식사 하고 오시면 될 것 같은데…….”
“아. 그래요? 우리 한준이 파트너 분이세요? 반가워요. 같이 식사하면 좋은데.”
“아, 아닙니다. 저는 다음에요. 한준아, 밥 맛있게 먹고 와. 나 먼저 들어간다!”
몇 년 만에 본 어머니의 얼굴은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다. 잘 살고 계시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보니 더 늙고 초라해진 모습에 마음이 아픈 한준이었다.
“한준아. 엄마가 미안해.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운동하면 힘들 텐데. 뱃속 든든하게 채우고 운동해야지.”
“국수가 먹고 싶어요. 멸치국수.”
공릉동 국수거리에서도 한참을 들어온 곳에 몇 평 안 되는 작은 가게에 들어왔다. 가게가 8평 남짓한 공간이라 더욱 밀착해서 앉게 되었다. 멸치 국수 두 그릇에 김밥 한 줄을 시켰다.
“좀 더 근사하고 든든한 거 먹지, 국수는 배 금방 꺼지는데.”
“김밥하고 먹으면 괜찮아요.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한준은 뒷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언제 한 번 어머니랑 여기 와보고 싶었어요. 여기 국수가 옛날에 어머니가 해주던 거랑 비슷한 맛이 나서 가끔 혼자 와서 먹고 가고 그랬거든요.”
어머니의 눈물이 국수그릇으로 똑 떨어졌다. 그동안 혼자 이곳을 찾아왔을 한준이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했다.
한준은 이제 경기 전까지 운동에 전념한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경기 끝나면 엄마가 직접 끓여주는 국수 맛보러 가겠다는 말을 용기 내어 꺼냈다. 어머니를 정류장까지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한준의 귓가에는 후루룩 소리가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