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이후로 녀석은 줄기차게 동생 하나 낳아달라고 졸라댔다. 생일은 물론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에도 녀석의 1순위 선물은 줄곧 동생이었다. 유치원에서 어떤 친구가 동생자랑을 했나보다. 그렇게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뒤로하고 동생소리부터 나오는 것을 보니 하나 낳아주면 좋으련만 안타까운 생각이 먼저 들기도 했다.
우리 부부가 철저한 계획아래 아이 하나를 키우려는 것은 아니었다. 몸이 약한 아내는 자궁벽이 약하여 착상이 잘 안되어 임신이 힘들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어렵게 첫아이를 임신하였으나 기쁨도 잠시 얼마 안 되어 유산을 했다. 아내는 첫 아이를 그렇게 보낸 마음에 절망감이 심했는지 몸이 더욱 약해져있었다. 그리고 2년 뒤 지금 나를 똑 닮은 이 녀석을 낳았다. 사실 워낙 임신가능성이 희박했었고 한 번의 유산을 경험한 터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기적적으로 아이가 생겼고 우리는 더할나위없이 기뻤다. 그런데 이러한 속사정을 알리 없는 요 귀여운 악당은 그렇게 엄마를 졸라댔다.
“아빠! 나 오늘 유치원에서 희망편지 썼는데 보여주까?”
“그래, 보여 줘봐. 뭐라고 썼어?”
“음. 다음 주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산타할부지한테 편지쓴고야.”
“보자, 또 동생 가지고 싶다고 썼어?”
“아니!”
“그럼?”
“음. 엄마가 안 아파서 동생 생길 수 있게 해달라고.”
이 녀석 꽤나 혼자 외로운가보다. 주말이나 틈틈이 놀아준다고 했는데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모양이었다.
다음날 이 녀석을 위해 귀여운 진돗개 한 마리를 분양받았다. 충성심이 강하고 사람과 친밀도가 많은 성격을 가졌다고 해서 특별히 진돗개로 정한 것이다.
“짜잔! 아빠가 우리 동민이 동생 데려왔다.”
“우와, 강아지다.”
“귀엽지? 얘는 진돗개야. 동민이가 귀여운 이름도 지어주고 동생처럼 잘 챙겨줘야해. 밥이랑 물도 챙겨주고 알았지? 그리고 아무데나 오줌 싸면 동민이가 치워줘야 해. 할 수 있겠어?”
“그럼. 당연하지. 헤헤. 이름은 음~ 진도로 할래. 진도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이 그냥 진도라고 불렀을 거 아니야. 그래서 그냥 진도라고 불러줄래.”
“그래. 앞으로 진도 잘 돌봐야해. 알겠지?”
“네!”
그날 이후로 녀석은 진도를 친 동생처럼 귀여워했다. 물론 모든 동물을 좋아하는 성격이긴 했어도 진도는 더욱 각별하게 여겼다. 유치원을 가기 전에도 진도와 떨어지기 싫다며 유치원에 진도를 데려가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아내와 한참 실랑이를 벌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유치원에서 돌아올 때면 친구들을 잔뜩 데리고 와 당당하게 동생이라고 소개시킨 적도 있다. 다행히 동민이가 진도와 잘 지내며 혼자 있는 시간에도 외로워하지 않았다.
형아가 되었다며 한결 씩씩해졌고 의젓해졌다. 진도가 지정된 곳에 볼일을 보지 않고 아무데나 배설을 하면 진도의 손을 잡고 타이르기도 했다 야단을 치기도 하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진도는 생각보다 쑥쑥 자랐다. 잘 놀고 잘 먹어서 그런지 몸집도 동민이 만해졌고 진도가 아기 때 사준 폭신한 집도 이제는 진도에게 너무 작았다. 아파트에서 몸채가 큰 개를 키운다는 것이 무리였던 것이다. 동민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도무지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당이 있는 작은 주택을 구하려고 해도 집이 팔리지 않은 상태에서 시기가 맞지 않아 약 한달 정도는 떨어져 지내야 한다고 했다. 동민은 그렇게 잘 따르던 진도를 잠깐 동안이라도 떨어져 있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일단은 동민이 유치원을 간 사이에 진도를 분양받았던 곳에 몇 주 정도만 맡겨놓기로 했다. 그 사이에 집을 알아보려던 참이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동민은 울며불며 진도를 찾아다녔다.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울면서 진도를 찾았다. 예상하던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차에 동창생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 집을 보러 와도 되겠냐는 연락이었다.
드디어 우리 네 식구가 한 자리에 있을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기쁜 마음에 얼른 동민이를 차에 태우고 진도를 데리러 갔다.
진도야 진도야. 나 왔어. 형아 왔어!
진도야 진도야, 이제는 우리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돼!
진도도 꼬리를 반갑게 흔들었다.
한가로운 오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언젠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직접 받아보니 기분이 묘하다. 언젠가 입영통지서를 받으면 부모님께 호들갑을 떨며 알리고 친구들에게 진짜 사나이가 된다며 자랑을 늘어놓을 것만 같았으나 막상 받아보니 조심스럽다. 일단은 책상서랍에 넣어둔다.
머리를 먼저 깎아야하나, 어떻게 기른 머리카락인데. 아니다. 여자 친구에게 말해야 하나 고민된다.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대한민국 남자라면 국방의 의무는 당연하건만 새삼 우리나라가 전시중임을 깨닫는다. 분단 그리고 전쟁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나라와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이맘때 남자들도 이런 기분일까? 괜스레 이등병의 편지를 흥얼거려본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뭉클하다.
한 달 남짓의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고민된다. 문득 옛날 강원도 철원에 갔었던 생각이 난다. 유난히 군부대가 많았던 곳. 차가운 바람이 서늘하게 감돌지만 따뜻했던 곳이 철원이다.
철원 땅을 밟았을 때 서늘하지만 맑은 바람을 스읍하고 마셔보았다. 상쾌하다. 머리를 짧게 자른다면 조금 추웠을 날씨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엔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나는 유원지에 놀러 가면 재미삼아 소총으로 인형을 맞추어 보곤 했다. 그런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아 실제 총을 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다시 찾은 철원은 여전히 고요했다. 물이 흘러가는 소리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곳은 수십 년 전 총성으로 가득했던 곳. 지금도 그 기운이 남아있는 곳이지만 총성의 여운보다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물결이 번지는 곳이기도 하다.
철의삼각전적지관광사업소를 시작으로 안보관광을 떠났다. 두 번째로 들린 곳은 제2땅굴로 한국군 초병이 경계 근무를 서던 도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굴착 끝에 발견한 땅굴이었다. 북한의 기습 남침용 지하 땅굴로 땅굴을 살펴보니 앞으로 군 생활을 미리 만나보는
세 번째로 들른 곳은 철원 평화전망대였다. 남북의 그리운 석별의 정이 녹아있는 평화전망대는 북녘 땅의 북한군 초소를 볼 수 있으며 철새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토교저수지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새들은 자유롭게 남과 북을 오고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해본다.
남자가 군대를 다녀오면 왜 진짜 사나이가 되었다고 말할까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묵묵히 시간을 보내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르는 사람이지만 국민이라는 이유로 목숨 바쳐 훈련하고 전투를 하기 때문일까.
철원에서 다시 서울로 내려오는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에 올라타고 잠시 생각해본다. 이 기차가 마지막으로 본 월정리역에 있던 기차라면 어떨까. 만약 정말 이 기차가 서울행이 아닌 저 북쪽의 어딘 가라면.
힘찬 경적소리가 울리고 기차가 움직였다. 눈을 감았다. 오롯이 기차의 움직임만을 느꼈다.
어디로 가는지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방향을 생각하니 뒤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짙은 풀색의 비니를 벗고 머리를 매만져본다. 까끌까끌하다.
집에 도착한 나는 식탁에 입영통지서를 올려놓았다.
때는 백제시대. 어둠이 얕게 깔리고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커지던 그 순간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검은 그림자가 달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드리운다. 휘리릭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여인이 서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왕실의 사람은 아닌듯하다.
드넓게 펼쳐진 연꽃 사이에 청초하게 서있는 여인은 왕실의 여인이 아닌가. 고운 비단 옷에 단정하게 빗어 내린 검은 머리카락. 달빛을 받아 더욱 고운 얼굴빛은 희고 여리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가운데 놓인 정자는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빛을 받아 아름답고 아름답게 피어난 연잎은 맑은 이슬을 머금고 있다. 그 가운데에 왕실의 여인이 서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 때 검은 그림자가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여인이 기다리던 사람인 듯했다.
궁남지는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고향을 그리워하여 무왕이 선화공주를 위해 만든 인공정원으로 천한 신분의 사람이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항상 어둠이 짙게 깔리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나온 것이다. 사실 이 둘이 처음 만난 곳도 이 궁남지이다. 그래서 무왕과 선화공주만큼이나 이 둘에게도 이곳 궁남지는 특별한 공간이다.
선화공주는 왕가의 무왕과 함께 이곳에서 달을 보는 것을 즐겨하였으나 왕실의 여인들과 산책하는 것도 즐겼다. 그래서 이 여인도 궁남지를 몇 번 들른 적이 있다. 그러다 선화공주는 궁남지 연못 한가운데에 핀 연꽃이 유난히 아름다워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연못 한가운데에 핀 꽃을 꺾으려면 연못으로 들어가야 했고 신하들도 무르고 나온 터라 꺾어다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마마, 이 연못 근처 마를 팔던 남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꽃을 꺾어달라는 청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러자 왕실의 다른 여인이 반기를 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곳은 저렇게 마를 파는 신분의 천한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 그냥 돌아가는 것이 맞는 듯 하옵니다.”
그러자 선화공주가 단호하게 말했지요.
“그런 말 마십시오. 마를 파는 사람이라고 어찌 다 천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지 궁금하니 이곳에 올 수 있으면 얼굴 한번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마를 팔던 남자는 궁남지에 들어와 선화공주에게 꽃을 꺾어다 주고 왕실의 여인을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이 여인과 남자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를 많이 닮아있었다. 그만큼 신분을 초월한 사랑은 이루어지기기도 힘들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이곳에서 사랑을 키워나갔다. 진흙과 닮은 남자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연꽃을 닮은 여인.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과 닮은 이 둘의 사랑도 둘처럼 아름답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할머니는 자주 혼자 계셨다. 언제부턴가는 가족들이 할머니를 보러오는 것도 귀찮은 눈치였다. 할머니는 엄마가 오징어채다 콩자반이다 밑반찬을 바리바리 싸와도 늘 김치 하나만 두고 드셨다. 그런데도 밥은 한 가득 꾹꾹 눌러 담아 드셨다. 그런 할머니에게 엄마는 바리바리 싸온 밑반찬과 함께 잔소리도 한 아름 늘어놓았다.
“엄마, 정말 이렇게 살 거야? 언제까지? 엄마도 아빠 따라 가려고 그래?”
“그런 말 마라. 이렇게 사는 게 어떻다고. 늙으면 다 그런 거지. 무슨 유난은. 이제 이런 것도 가져오지 마. 먹고 사는데 아무 문제없으니까.”
“김치, 지겹지도 않아? 그것도 폭삭 쉬어터진거. 만두도 못해먹겠다.”
할머니는 엄마의 잔소리가 귀찮다는 듯 조용히 보청기를 내려놓으셨다.
엄마는 할머니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분풀이랄까 아니면 그것이 이 두 모녀만의 대화 방법이었을지는 모른다. 그저 반찬만 두고 바로 돌아선다면 독거노인 돌보러 오는 사회복지사와 무엇이 다를까 생각한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이렇게 혼자 계시기 시작한 것은 몇 달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부터이다. 엄마는 할머니가 혼자 계시는 것이 안타까워 모셔간다고 우겼으나 할머니의 고집은 누구도 말릴 수 없이 단호했다. 엄마가 할머니께 반찬을 가져다줄 때면 내가 항상 뒤따랐다. 할머니 혼자 계신 집에 발을 들일 때면 항상 퀴퀴하면서도 짠 냄새가 났다. 할머니 고유의 살비듬 냄새가 벽지와 가구, 침구에 배어있는 듯했다. 할머니 댁에 갈 때면 은연중에 나도 모르게 킁킁거렸다. 예전에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에는 분명 깔끔한 냄새가 났었다고 기억한다.
“엄마, 할머니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나.”
“그런 말 마. 가꾸지 않아서 그래. 혼자 살면 원래 더 그런 거야.”
그리움이 켜켜이 쌓여서일까. 할머니의 방에서는 짜고 비릿한 냄새가 났다. 마치 새우젓과 같은 냄새랄까. 할머니의 흔적이 묻어있는 곳에서는 항상 할머니 냄새가 났다.
엄마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배추와 파 고추 등 김장에 필요한 재료들을 샀다. 할머니가 다 쉬어터진 김치만 두고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거실 한가득 김치 재료들을 늘어놓았다. 엄마는 한숨을 푹푹 쉬었으나 할머니를 다시금 찾아 뵐 이유가 생겼음에 기분이 들떠보였다.
김장 재료들 사이로 새우젓이 눈에 들었다. 할머니 방이 떠올랐다. 나중에 우리 엄마 방에서도 이런 냄새가 난다면 어떨까?
보자기로 한 보따리를 들고 할머니 댁을 다시 찾았다. 할머니는 반가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심 속으로는 반가우신 모양이었다. 엄마는 언제나 그랬듯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저번에 엄마가 가져다 준 반찬이 거의 그대로였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을 한 냉장고는 늠름하게 문을 닫았고 엄마의 잔소리는 다시금 시작되었다.
“엄마, 내가 가져다 준 반찬 하나도 안 먹었어?”
“먹었어.”
“뭘 먹어. 그대론데. 정말 속상하게. 또 김치 하나만 두고 먹었어? 휴. 안 그래도 김치 새로 담가왔어,”
“뭘. 또 새로 만들었어. 놔두라니까.”
할머니가 오늘은 보청기를 빼놓지 않는다. 엄마와의 대화가 이제는 귀찮지는 않은가 보다. 할머니의 방에 들어서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셔보았다. 할머니 냄새가 희미하게 묻어있었다.
할머니의 흔적이 묻은 곳에서는 짜고 비릿한 냄새가 났다.
엄마한테는 짭조름한 냄새가 난다. 그것은 땀 냄새도 아니고 엄마 한테서만 풍기는 엄마냄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슈퍼맘이나 워킹맘이라는 단어가 선풍적으로 쓰인 때가 있었다.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엄마들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슈퍼우먼을 뜻하는 말이었다. 나는 엄마를 생각하며 우리 엄마가 슈퍼맘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로 자식들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슈퍼맘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슈퍼맘의 길에 접어들었겠지만 우리 엄마는 등 떠밀려 슈퍼맘이 되어야했다.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공부시키려고 엄마는 참 열심히 일했다.
처음부터 식당을 개업한 것은 아니었다. 동네의 조금 큰 한식당에서 주방 설거지를 하고 홀 서빙 일부터 시작했다. 식당이 문을 여는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식당이 문을 닫는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손은 항상 부르트고 거칠었다. 사실 엄마와 같이 살면서도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은 거의 없었다. 학교에 가려고 일어나면 엄마는 이미 식당에 가신 후라 아침상만 덩그러니 있었고 밤에는 엄마를 기다리다 먼저 잠든 적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해를 더 식당에서 일을 한 엄마는 이듬해 봄에 작은 한식당을 열었다. 식당에서 음식판매뿐 아니라 반찬을 함께 팔기도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닮아 요리솜씨가 있다고 했다. 엄마는 음식에 있어서 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며 소금을 가장 깐깐하게 생각했다. 엄마는 메인 요리와 함께 나가는 밑반찬들을 직접 만들었으며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밑반찬이 깔끔하고 맛있다며 종종 구매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계속 일을 고집하는 엄마에게 이제 그만 쉬라고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사람이 하던 일을 안 하고 집안에만 있으면 빨리 늙는 거라고 했다. 하긴 지금까지 엄마의 삶에는 조금의 쉼도 없었다. 늘 바쁘고 억척스럽게 살아왔던 삶이라 여유라는 쉼이 엄마에겐 어떤 것보다 낯설기도 할 것이다. 엄마의 삶을 봐왔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누가 짠돌이 아지매 아니랄까봐 자식농사 풍년인데 뭣하러 지금까지 고생이냐고 했고, 엄마는 “짠돌이 어디 가나요. 그러지 말고 계모임 같은 거 있으면 다른 식당 가지 말고 우리 식당으로 와요”하며 웃음만 지었다.
사람들은 엄마를 짠돌이 아지매라 불렀다. 엄마와 나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아마 짠돌이라는 별명에서 일 것이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용돈을 참 적게 주셨다. 그래서 돈을 아끼고 아껴야만 겨우 학교 준비물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학교 문구점에서 파는 100원 200원짜리 불량식품도 내겐 사치였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고등학교 때까지 내 별명은 짠돌이였다. 물론 지금도 짠돌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다. 지금은 여유 있는 생활을 할 만큼 벌이가 괜찮아 졌지만 여전히 돈을 허투루 쓴 적이 없다. 아마 나도 나이가 들면 엄마처럼 짠돌이 아지매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침부터 엄마가 분주한 걸 보니 반찬으로 나갈 배추겉절이와 오이소박이, 각종 나물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가끔 회사에 월차를 내는 날이면 엄마를 도와 반찬을 만들며 식당일을 돕는다. 엄마는 반찬을 만들 때에도 항상 ‘소금’의 중요성을 연설했다. 싱싱하고 좋은 재료만큼 음식의 풍미를 돋우어주는 소금의 선택이 맛을 좌우한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신안에서도 가장 좋은 천일염만을 고집했다. 나는 이런 좋은 소금 쓴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냐고 했지만 엄마는 식당을 찾는 손님들의 입맛은 귀신보다 더 무서운 법이라고 했다. 간 하나에 발길이 이어지고 끊기는 일이 다반사였고 칭찬과 쓴 소리가 좌우되는 것이라고 했다. 질 낮은 소금을 쓰면 음식이 텁텁하고 쓴 맛이 감돌며 질 좋은 천일염을 쓰면 깔끔하고 풍미 있는 깊은 맛을 낸다고 했다.
엄마의 고집은 소금만큼이나 짭짤했다. 질 좋은 소금을 써서 일까 사람들은 엄마의 음식솜씨를 칭찬했고 ‘짠돌이 아지매’ 식당을 찾는 사람들도 부쩍 많아졌다.
엄마가 일을 갔다 돌아오면 엄마 특유의 짙은 냄새가 났다. 엄마에게 풍기는 짭조름한 냄새도 질 좋은 천일염처럼 기분 좋은 엄마 고유의 냄새로 기억될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예쁜 꽃도 금방 시들고 아끼던 보석들도 금세 싫증 나고 마는데. 아니,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마음이 바뀌는 건 한순간이라고들 하는데 과연 세상에 영원한 것은 과연.
모든 것이 변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옛날부터 사람들은 춤과 노래를 즐겼으며 그곳에는 항상 술이 빠지지 않았다. 술의 신 디오니스소 시대부터.
2차도 모자라 3차까지 가자는 진호를 극구 뜯어말리느라 택시를 잡았다가 보내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줄지어 서 있는 가로수 나무에 헛구역질을 해대면서도 막무가내다. 연호는 만취한 진호의 모습이 놀랍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그저 말없이 택시에 탑승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딱 한 잔만 더 하자니까. 엉? 딱 한잔만. 아니면 노래방 갈까? 너 우리 집에서 얻어간 포도 생각해봐 짜식. 근데 술 한 잔도 더 못해? 치사한 놈”
연호는 진호의 주사를 더는 들어줄 수 없다는 듯 가까스로 잡은 택시에 구겨 넣듯이 진호를 밀어 넣었다.
진호네는 과수원을 했다. 포도농사. 장마철이면 한 해 농사를 망칠까 가슴을 졸였으며 알이 실하지 않을까 상품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늘 부모님은 사서 걱정을 했다. 진호가 서울에 올라와 직장을 갖기 전까지 부모님을 도와 포도재배를 했다. 어린아이 만지듯 조심히 다루라는 부모님의 말에 조심스럽게 포도를 땄다. 가만히 포도를 본 진호는 포도껍질에 낀 흰 당분을 보고 연호를 떠올렸다. 연호의 혀에 낀 하얀 백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연호는 유난히 진호네 포도를 좋아했다.
원래 포도껍질에 하얗게 낀 것이 맛있거든. 바로 당분이 많이 있다는 증거야. 이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진호는 연호의 혓바닥을 바라보았다. 분홍빛과 보랏빛이 적절히 섞인 혓바닥에 낀 하얀 것을.
몇 시간 전 진호는 문득 연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 술 한 잔 하자는 것이다. 할 말이 있다고. 퇴근시간의 극심한 러시아워 때문에 연호는 약속장소에 30분 정도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금요일임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연호가 앉아있는 진호를 발견했을 때 이미 진호는 얼굴이 조금 붉어있었고 이미 술을 마시고 있는 상태였다.
“뭐야, 내가 조금 늦은 사이 혼자 시작한 거야?”
“그러길래 누가 늦게 오래? 약속시간도 안 지키고 말이야. 엉? 내가 클라이언트였다면 넌 꽝이야 인마. 알아? 클라이언트는 삼분도 안 기다려 준다고.”
“그래, 알았어. 근데 웬 와인이야? 너 포도 지긋지긋하다고 와인은 입에도 안 대던 애가?”
“그냥, 나 내려가서 살까 봐. 과수원 일이나 하고.”
“갑자기 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없었어. 그런 거.”
연호를 만나기 두 시간 전. 팀장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진호를 불렀다. 진호네가 과수원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이번 와인열차 기획에 담당으로 진호를 추천할 예정이라고 언지를 주었다. 월말에 인사고과가 있던 차에 팀장의 부름은 진호에게는 틀림없는 기회였다.
“김대리. 내가 자네 팍팍 밀어주고 있는 거 알지? 그래서 말인데…”
진호는 연호가 보고 싶어졌다. 팀장의 혓바닥에서 하얗게 낀 백태를 보아서일까.
세월이 변하고 강산이 변하여 내가 사는 모습 또한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 태백산맥 말단의 백양산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내 상세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백 년을 사는 속세의 사람들은 하루를 단위로 가치를 매기나, 수천 년을 사는 내게 하루하루는 덧없이 흐르는 세월 속의 한 자락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내 명도 다하여 백양산 어느 언저리에 조용히 젖어 들고자 하니, 눈에 띄는 것은 천 년 전이나 다름없이 운수사 뿐이라.
이 절이 처음으로 지어지던 날 또한 내 상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여느 때처럼 산을 한 바퀴 휘이 돌아 잠을 자러 가던 차에, 가야국의 사람 몇이 서까래가 될 나무들을 날라 오던 모습만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잠시 몸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엿들어 보았었다.
“이곳에서 상서로운 운하가 피어오르는 걸 보았다는 게 정말인가?”
“그럼. 나는 본디 가락에 살던 사람이라 이 산을 자주 올려다보았네. 아침이면 이곳에서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꽃 무지개가 뜨는 것을 가락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았지.”
“그것 참 신통한 일일세. 아마 이 곳에 신선이 살고 있나 보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만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천 년을 살아온지라, 내가 기침하여 하품을 할 때면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기지개를 켤 때면 꽃 무지개가 뜨는 것을 가야국의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이 깊은 산중까지 내 흔적을 찾아올 생각을 한 것이 참으로 기특하여 운수사가 완공되었을 때, 이곳을 복전으로 만들어 줄 복두꺼비 한 마리를 몰래 내려 주었다.
그런데 운수사 터는 자꾸 넓어져만 갔다. 소원을 들어 준다는 영험한 두꺼비 바위를 찾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 끼의 공양을 짓는 데 쌀뜨물이 운수 계곡을 거쳐 십 리나 떨어진 모라 마을까지 흘러내릴 정도이니, 이 정도면 과하다 하겠다. 가야인들의 심성이 선하여 자연을 해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매일같이 인파가 다녀가니 내 몸 하나 편히 누일 곳이 사라져 가더라. 내 용왕과도 각별한 사이인지라 산신각 대신에 용왕각을 지은 것은 개의치 않으나, 날이 갈수록 산중이 소란스러워짐은 쉬이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 중히 여기던 산의 한 자락을 기꺼이 내어 주었거늘, 어찌하여 산을 이리 마음대로 누리는가. 산중을 거니는 것이 유일한 내 귀에 매일같이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오니, 내가 견디기가 힘들어지는구려.”
벼르다 못해 주지 스님의 꿈에 나타나자 선한 주지 스님이 예상치 못한 호령에 황망해 하더라. 고민 끝에 주지 스님이 두꺼비 바위의 턱을 깨어 버리자, 본디 용왕에게서 맡아 바위 안에서 기르던 청사자 한 마리가 그대로 떠나 버렸다. 용왕께 돌려보낼 때가 되었다 생각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런 일에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동안 구름이 피고 무지개가 뜨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으니,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줄고 종국에는 사세가 기울어 가더라. 미안한 마음에 세진당 모퉁이에 팽나무 한 그루를 심어 두었다.
두꺼비 바위에서 도망친 청사자는 범어사로 갔다 하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 운수사도 천년고찰의 칭호를 얻게 되니, 이 또한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왜적의 난으로 불에 탔던 건물도 모두 복원되었으나, 운수사의 낡은 처마 끝에 나와 함께 지내 온 세월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금정봉과 불웅령을 돌아 하천 줄기를 따라 낙동강까지 둘러보았다. 마실의 종착지는 언제나 운수사 대웅전 앞이다. 나와 함께 천 년을 숨 쉰 곳이니, 이 조용한 절에 녹아들어 신선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 년을 숨 쉬어 온 절과 함께 천 년을 더 걸어갈 꿈을 꾸니, 마지막 꿈으로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은 꿈이다.
아내와 이혼 한 뒤에도 별 탈 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는 딸은 몇 년 전에 오붓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잡아주지는 못했지만, 딸과 종종 연락을 하며 지내기는 했다. 딸에게도 이제는 귀여운 딸이 생겼다. 아내와 이혼한 이후로 자주 만나지 못해서일까, 딸도 이제는 삼십 대 중반이 되었지만 내게는 여전히 아이가 아이를 낳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나이 들어 한 가지 취미가 생겼다. 바로 철새들을 사진에 담는 것이었는데,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많이 새들을 담고 싶은 마음에 딸이 결혼한 바로 그 해에는 낙동강 하류로 이사까지 왔다. 사실은 이사를 결정했을 때, 아내가 지금 이 곳에 살고 있다고 들은 것을 조금 염두에 두기도 했었다.
“왜? 왜, 할아버지. 한국, 눈 오는 나라!”
“민주야, 거 가만히 있지만 말고 유리한테 여기 따뜻해서 눈 안 온다고 영어로 설명 좀 해 줘 봐봐.”
나는 매년 설날만 되면 난감한 상황에 처하곤 했었다. 손녀가 태어난 이후로 딸은 일 년에 한 번, 설에만 내 집에 다녀가곤 했는데, 겨울이 없는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나고 자란 손녀딸은 부산에서 항상 눈을 찾는 것이었다. 여섯 살 배기 손녀딸은 부산에서는 좀처럼 눈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눌한 한국어로 매년 눈을 보여 달라 보채다가 종국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한층 더 난감한 상황이 찾아왔다. 딸이 돌연 유리만 내게 맡기고는, 제 남편이랑 아내의 집에 다녀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손녀가 잠든 사이, 딸과 사위가 슬그머니 집을 나섰다. 유리는 역시나 일어나자마자 눈을 찾기 시작했고, 나는 유리의 손을 잡고 딸이 사전에 일러 준 장소로 향했다.
유리가 신이 나서 하도 뛰어 다니는 통에 나는 혹여 유리를 놓칠까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부산시민이 된지도 어느 새 칠 년 차인데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내가 종종 철새 사진을 찍으러 오던 생태공원에 부산에 단 하나 뿐인 눈썰매장이 열린 것이다.
눈썰매장은 눈을 찾으러 나온 아이들로 가득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 눈에 봐도 예쁘장한 혼혈아인 유리를 보고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는데, 나는 손녀 애의 보호자인 것이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일 년에 꼭 한 번 밖에 못 보는 아이인지라 손녀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었고, 무엇보다 철새처럼 아이도 곧 제 부모를 따라 내 손을 떠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손녀와의 첫 외출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할아버지! 여기!”
슬로프를 미끄러져 내려오며 손녀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이는 신이 난 모양이었지만, 할아버지 되는 입장에서는 불안하기만 하다. 나는 손녀가 넘어질세라 얼른 썰매가 오는 쪽으로 달려가 손녀를 받아 안았다.
그런데 손녀 쪽으로 달려오다가 발걸음을 멈추는 한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이십 여 년 동안 자글자글하게 주름이 져 버린 아내가 서 있었다.
사위는 떠나기 전에 내 손에 먼 타국의 이름이 적힌 비행기 티켓 두 장을 건네주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으려니, 딸애가 다가와 티켓을 쥔 내 손을 잡으며 가만히 말을 걸어 왔다.
“아빠, 있잖아. 옛날에 엄마는, 한 번쯤은 아빠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집에 찾아 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어. 아빠가 돌아와야 할 곳이 언제나 우리 집으로 정해져 있었으면 했었어.”
그 날, 아내는 딸과 사위를 따라 왔던 자리에서 나를 마주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던지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나는 인파를 헤치고 있는 그 뒷모습에서 미움이나 경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설렘이나 사랑은 더더욱 아닌 미묘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내게도 그렇듯이 아내에게도 아쉬움이 깊게 남았으리라. 제가 사는 낙동강 하류에 어느 새 나도 흘러들어 있던 것을, 아내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