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구 곳곳의 지명에서 전해오는 옛이야기, 국내여행,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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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양천구 지역호감도

양천구 곳곳의 지명에서 전해오는 옛이야기


양천구는 고구려의 ‘재차파의현’으로 불리기 시작해,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 때는 공암현이라 변경돼 부천군의 옛 이름인 율진군에 속했다. 그 후 고려 성종 14년에 영토를 5도로 나눠 양광도에 귀속됐다. 이처럼 행정구역이 변경되는 과정에서 양원, 양평, 파릉, 제양 등으로 개칭됐고 고려 충선왕 2년(1310년)에 비로소 양천이라는 지명으로 명명돼 작은 암굴의 땅 이름에서 더 넓은 뜻을 가진 땅이름으로 됐다. 유독 지명에서 전해오는 설화가 많은 양천구 곳곳을 찾아가 보자.

                    
                

오목교 건설과정에서 전해진 오동나무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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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준공된 양천구 오목교의 정식이름은 오금교였으나 지역민들은 오목교로 부르고 있다.

양천구는 대규모 주택단지가 많이 들어선 곳이다. 이들이 경제활동을 벌이는 도심지로 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다리가 만들어져야 했을 것. 그러나 옛날에 양천구 지역은 농촌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다리가 필요 없었으며 김포와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서 필요했던 다리가 바로 오목교다. 한강으로 유입되는 안양천은 원래 이름이 ‘오목내’였다. 이 부분에는 많은 개울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오목교 근방에 이르면 이들 개울에서 나온 물길들이 한데 모이면서 하천바닥을 움푹하게 골을 만들었고 이처럼 골이 형성돼 움푹 들어간 곳을 '오목하게 만들어진 내'라는 뜻으로 오목내라 했다. 이러한 오목내에 다리를 건설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기는 했지만 이곳에서는 물살이 세 다리를 건설하기가 힘들었다. 바로 이때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리를 건설하는 과정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곳의 물살이 세어 도저히 건널 수가 없게 되자 동네 사람들이 다리를 놓기로 했다. 그러나 매양 다리를 놓을 때마다 떠내려가므로 동네 사람들은 다른 방도를 구하고자 노력했다. 이때 한 늙은 스님이 지나가다가 떠내려가는 다리를 붙잡아 매는 모습을 보고 “쯧쯧! 오동나무로 다리를 놓으면 쉬울 것을”이라며 지나갔다. 이 말을 들은 인부 한사람이 급히 달려가 “무슨 말인가”라고 되묻자 “여울에서 오동나무를 떠내려 보내 멈추는 곳이 다리를 놓을 곳인데 괜한 장소에서 애쓰며 다리를 놓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며 오히려 정색했다. 이에 사람들이 속는 셈 치고 노승의 말대로 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근방에는 오동나무가 하나도 없으므로 멀리 남쪽에 있는 칼산에서 오동나무를 베어 바로 안양천 물에 띄우자 과연 지금의 오목교 근방에서 멈추므로 이곳에다 다리를 건설했다. 이때부터 다리가 떠내려가는 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오동나무다리라 불렀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렇게 건설된 오목교는 이후 양천구 지역의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서울이 팽창하면서 영등포지역이 공업단지와 상업단지로 변모하면서 양천구 지역의 주민들은 이 다리를 통해 통근했으며, 장마가 져서 다리에 물이 넘쳐 건너가기 어려웠음에도 배를 띄워서라도 넘어야 하는 필요성이 있었다면 오목교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역할을 했을 것인가는 자명한 이치다. 세월이 흘러 양천구 지역이 주택단지로 변모하면서 오목교에는 계속 새로운 다리를 설치했고, 옛날에 세웠던 나무다리와 장마 때 지나던 배의 흔적은 사라졌다. 하지만 오목교 건설과정의 전설이 전해져 당시 사람들이 오목교를 건설해야만 했던 절박한 필요성과 무수한 어려움을 뚫고 오목교를 건설해 나가는 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곰달래마을의 비극적인 사랑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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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구 곰달래 마을은 옛 백제시기 백제청년과 사랑하는 여인의 비극적인 전설이 전해오는 마을이다.

곰달래마을에서는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곰달래 사랑이 그것. 삼국시대 한강유역이 백제 땅이었을 때 이곳에 서로 사랑하는 음소(音召)와 음월(音月)이라는 남녀가 살고 있었다. 신라의 힘이 점차 세져 끊임없이 백제를 위협하자 전국에 군대소집 명령이 내렸고 이곳에 살던 청년도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다. 청년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동산에 둥근달이 깃발처럼 떠오르면 백제가 이긴 것이니 자신을 기다리고 칠흑 같은 밤이 되면 백제가 싸움에 진 것이니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라는 말을 한 후 전쟁터로 떠났다.

몇 날이나 계속되던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 끝나갈 무렵 동산에는 손톱 반만큼이나 작은 조각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다가 이내 커다란 둥근달이 되었다. 여인은 기뻐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먹구름이 지나가면서 다시 캄캄한 밤으로 바뀌었고 이에 놀란 여인은 산위에 올라가 아래로 몸을 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구름이 지나가 다시 환하고 커다란 달이 나왔으며 얼마 후 밤새 먼 길을 달려 청년이 왔으나 이미 여인의 목숨은 끊어진 상태였다.

산꼭대기 달이 떠오르는 곳에 자신의 손으로 여인을 묻고 돌아서며 청년은 '이제 끝이다. 거친 세상 끝이구나'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해 고음월(古音月)이 되었다. 고(古)는 이두음으로 사용할 때 거칠다. 끝났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바로 음월이의 목숨이 끝났다는 표현으로 이것이 변해 고음월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남편과 사별한 부인 이씨의 열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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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시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열녀문은 양천구 열녀문뿐이다.

열녀문은 충과 효를 지킨 여인의 절개를 큰 미덕으로 여기던 시절에 절개를 지킨 여성을 칭하기 위해 임금이 하사하는 문이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양천구의 열녀문 이야기 속 주인공인 부인 이씨는 전의 이씨(全義 李氏) 명문의 귀한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행실이 단정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이씨는 원주 원씨 가문에 출가해 남편과 시부모를 섬기며 동기간의 화목도 돈독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중병으로 눕게 되자 부인 이씨는 동분서주하며 널리 약을 구하고 밤을 새어 간호를 했다. 남편이 죽기 직전에는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남편에게 먹이는 정성을 다했으나 결국 남편은 죽고 말았다.

부인 이씨는 남편을 사별한 여인이라는 죄의식으로 하늘이 무섭다 해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는 일 없이 생활하며 남편의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사별한 남편에 대한 애통함 때문에 끼니로 주어지는 밥상의 음식들을 먹지 않고, 몰래 버리고 1주일간 단식해 20대 후반에 죽고 말았다. 이런 알게된 조선의 조정에서는 1729년(영조 5년)에 이씨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홍살문 형태의 열녀문을 하사했다. 즉, 부인 이씨의 열녀문은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여성들이 어떤 가치관으로 살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2004년, 원주 원씨 종친회는 이 열녀문을 양천구에 기증했다. 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열녀문이 훼손되고 주변 지역의 개발로 멸실의 우려마저 있어 이를 구에 기증키로 한 것이다. 이씨 부인의 열녀문은 서울 시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기에 그 의미가 깊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열녀문은 지난 1994년 서울시와 양천구의 명소로 지정됐지만 훼손 정도가 심하여, 시 문화재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열녀문을 기증받은 양천구는 공터를 이용해 신정네거리부터 열녀문비까지 장수공원을 만들어 구민 체육시설 및 휴식공간을 조성하고 열녀문을 이전했다. 또한 열녀문의 전각을 세우는 등 훼손된 부분을 복원했고, 과거와 현재의 삶을 연결시키는 ‘문화와 역사의 공간’으로 꾸며가고 있다.

 

한강에서 바다로 가는 지름길, 정랑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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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구 정랑고개는 인천 소래로 통하는 지름길이며 이 길로 인천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서울로 운송됐다.

정랑고개는 대동여지도에는 인천간로(仁川間路)로 표시되어 있는 옛길이며 한강권에서 바다로 가는 지름길로서 처음 넘는 고개이다. 정랑고개를 지나 넘은 들에서 궁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인천 소래로 가는 지름길이다. 또 지양산 까치고개를 넘어 부평 들판을 지나 장명이 고개를 넘으면 인천 공촌동으로 이어지는 고대의 길이기도 하다. 인천 소래염전과 공촌동의 서곶염전은 고대로부터 대표적인 소금 생산지로서 정랑고개를 넘어가는 길은 한강권 인류 역사에 비중이 큰 고대의 소금길이다.

고대 초기 강화 지역까지 아우르지 못한 세력들이 육로를 통하여 해산물을 확보할 시에는 이 길을 사용하게 되어, 곳곳마다 성을 쌓고 지키던 토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 곳 정랑고개와도 연결된 토성이 발견됐다. 정랑고개의 고개 이름의 뜻은 적령으로 ‘적을 막는 고개’ 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현재는 계남공원생태통로의 조성으로 신트리 사거리에서 금옥여고 방향으로 넘어가는 쪽의 왼쪽편 생태통로에 입구로 자리를 이전했다.

 

마을의 수호신이 된 150년 수령의 느티나무

각종 재난과 재해를 극복하며 잘 자라온 느티나무는 이제 마을사람들의 수호신이 되어주고 있다.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마을에는 마을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당산나무 한 그루 쯤 있게 마련이다. 양천구 목동에도 수령 150년을 자랑하는 노거수가 한 그루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굵직한 역사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꿋꿋이 자란 느티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이 느티나무는 이곳이 지금처럼 대규모 주택단지로 변하기 이전부터 사람이 살고 마을이 존재했었음을 알려주는 소중한 증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마을의 주민이 식재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받아 잠시 고사상태가 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새순이 움트는 등 각종 고난을 극복하고 잘 자라고 있다. 이처럼 어려움을 잘 극복해온 덕인지, 이곳에서 건강과 소원을 빌면 누구든 그 바람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함부로 훼손할 경우 저주를 받고 큰 재앙이 뒤따른 다는 섬찟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때문에 마을에서 오래 전부터 잘 보호해 현재까지 살아있다. 양천구의 역사와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느티나무. 혹 목동 일대를 지나칠 일이 있거든, 이 느티나무에 들러 가슴 속 깊숙이 담아 두었던 소원을 빌어 보자. 소망이 실제로 이뤄질 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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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흔적이 묻어있는 양천구!
오목교와 곰달래 마을의 이야기 속으로 풍덩~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08월 18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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