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헌릉] 왕자의 난, 태종, 국내여행,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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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헌릉] 왕자의 난, 태종


조선왕조 사상 가장 왕권이 강했던 왕을 꼽는다면 아마 태종(太宗, 1367~1422년)이 높은 순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태조와 원비(元妃) 신의왕후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태종 이방원은 왕권을 위해 자신의 형제들을 무참히 제거한 무서운 인물로 너무나 잘 알려졌다. 태조를 따라 무인으로 성장한 대부분의 아들과 달리 태종은 학문을 소홀히 하지 않은 문무를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그의 탄생 또한 예사롭지 않았는데 어머니 한씨는 점쟁이에게 태종의 사주를 봐 달라 부탁했더니 점쟁이가 “이 사주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쟁이에게 경솔히 물어보지 말 것이며,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 영기(英氣)이다.”고 전했다. 과연, 태종은 1382년 고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데 이어 1383년 병과 제칠인(第七人)에 급제하니 태조와 신의왕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듯 태종은 날로 학문과 무예를 갈고닦았으나 그것이 궁궐의 피바람을 몰고 오리라고는 아마 자신 또한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왕위 계승을 위한 골육상쟁(骨肉相爭) 

  • 헌릉에는 태종 이방원과 왕비 원경왕후가 잠들어있다.

고려 말 혼란의 정국 속에서 조선 건국 1년 전인 1391년 친어머니 신의왕후가 죽자 태종은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의 낙마사건을 핑계로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보필한다. 이방원은 치밀한 계획으로 아버지 견제하기 위해 측근세력을 탄해하는 정몽주를 먼저 죽이려 하지만 이성계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설득을 통해 충성스럽고 강직한 정몽주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정몽주를 설득할 마지막 기회라 생각한 이방원은 정몽주를 불러다 놓고 시 한 수를 읊는다. 너무나도 유명한 《하여가(何如歌)》다.

此亦何如彼亦何如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제 기울어져버린 고려왕조를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개국하자는 제안에 정몽주 역시 시조 한 수를 읊으며 단호하게 거부한다.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인내심에 한계에 다다른 태종은 결국, 무사를 보내 정몽주를 죽인다. 정몽주가 죽은 후 그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는 선죽교에서 벌어진 일이다. 태조는 정몽주의 제거 소식을 듣고 태종을 나무라며 대노하지만 사실, 조선 개국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제거된 셈이었다. 태종이 조선 개국의 큰 공을 세운 것임이 틀림없었다. 새로운 왕조 개국의 기쁨도 잠시 분쟁의 씨앗은 생각보다 빨리 싹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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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태종의 능 앞쪽에는 다양한 석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왕세자의 책봉 문제를 두고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신권 정치를 주장하던 태조의 오른팔 정도전은 강력한 왕권을 내세우는 태종이 두려워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의안대군 방석을 세자에 올리려 한다. 결국, 태종은 분노하고 즉각 행동에 돌입했다. 아버지 태조가 말려도 정몽주를 무참히 살해한 그가 아닌가. 본처의 소생이 멀쩡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유로 태종은 방석과 방번 그리고 태조의 사위 이제까지 죽인다. 충격을 받은 태조는 둘째 영안대군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조선 제2대 임금 정종이다. 정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 왕세제는 이방원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평소 이방원의 기개(氣槪)를 시기 질투했던 형 방간은 왕세제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했지만, 이방원은 군사로 제압한다. 결국,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정종은 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태종의 힘은 역시 사병(私兵)이었다. 하지만 태종은 또 다른 왕자의 난을 용납할 수 없었다. 왕권 강화에 나선 태종은 사병을 혁파했으며 고려의 잔재를 없애고 제도를 정비했다. 지금의 주민등록증에 비교할 수 있는 호패법의 실시로 군역과 세금 징수의 효율적 운영이 가능해졌으며 자연스럽게 국가 기강은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형제간의 피 바람을 통해 왕위에 올라 도의적 비난을 피할 수 없지만, 조선 초기의 기틀을 다잡았다는 점은 분명한 그의 치적이라 할 만하다.

즉위 기간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태종 또한 세월을 비켜갈 순 없었다. 안정적인 왕권의 양도를 위해 셋째 충녕대군(세종)에게 1418년 왕위를 일찌감치 넘겨준 태종은 1422년 창경궁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56세였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가 함께 잠들어 있는 헌릉(獻陵)은 한 언덕의 두 개의 봉분이 조성된 쌍릉이다. 재위 기간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그의 무덤답게 탁 트인 전경을 자랑한다. 무덤의 전체적인 양식은 아버지 태조의 건원릉을 따랐고, 병풍석과 난간석 모두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조선왕릉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헌릉에는 제사를 지내고 지방을 태우는 시설인 소전대가 남아있는데 태조의 건원릉과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조선 초기의 석물이다.

효심이 남달랐던 세종은 죽어서도 태종의 곁에서 잠들길 원해 실제로 18년간 헌릉 서쪽에 있다 지금의 경기도 여주로 옮겨졌다. 헌릉은 현재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인 인릉과 함께 서울시 서초구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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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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