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수릉] 강직한 대리청정의 표본, 효명세자, 국내여행,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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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수릉] 강직한 대리청정의 표본, 효명세자


 추존왕 문조(文祖, 1809~1830년)는 조선 제23대 임금인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으며, 제24대 임금 헌종의 아버지이다. 왕세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들 헌종에 의해 익종으로 추존왕이 되었고 이후 고종에 의해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사실, 후대엔 문조라는 이름보다는 효명세자(孝明世子)로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순조-헌종-철종’으로 이어지는 3대 60여 년에 걸친 세도정치의 시발점과 맞닿아있었다. 아버지 순조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영조 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한다. 1803년 친정을 시작하면서 순조는 장인 김조순(안동 김씨) 등 외척가문에 맞서 적극적인 국정운영을 펼치지만 1809년 유례없는 기근과 1811년 홍경래의 난에 부딪히며 점점 힘을 잃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건강까지 나빠지면서 영·정조대의 탕평책에도 굴하지 않았던 세도가문의 정치 세력에게 국정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결국, 순조는 마지막 반전의 카드로 아들 효명세자를 내세운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왕실 중흥의 꿈

  • 세도정치의 타파를 꾀하던 순조의 마지막 희망은 학문과 예술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효명세자였다

    세도정치의 타파를 꾀하던 순조의 마지막 희망은 학문과 예술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효명세자였다.

건강이 나빠진 순조는 효명세자를 내세워 대리청정을 시킨다. 어릴 적부터 학문과 예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효명세자는 뿌리 깊이 박힌 세도가문의 세력을 타개할 준비된 카드였던 셈이다.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서무를 대리하도록 명한 상황을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신미년 이후부터는 정섭(靜攝)하는 중에 있던 때가 많았고, 비록 혹 약간 편안하다고는 하나 때로는 항상 기무(機務)에 정체(停滯)됨이 많았으니, 국인(國人)이 근심하는 것은 곧 내가 스스로 근심하는 바이다. 세자(世子)는 총명하고 영리하며 나이가 점차 장성하여 가니 요즘 시좌(侍坐)하거나 섭향(攝享)하게 하는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 멀리는 당(唐)나라를 상고하고 가까이는 열성조(列聖祖)의 대리 청정(代理廳政)하는 일을 본받아 내 마음이 이미 정하여졌다. 한편으로는 노고(勞苦)를 분담하여 조양(調養)을 편하게 하는 것을 돕게 하고, 한편으로는 밝게 익혀서 치도(治道)를 통달하게 하는 것이니, 이는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이다. 조정에 나와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에 대계(大計)를 고하니, 왕세자의 청정(廳政)은 한결 같이 을미년의 절목(節目)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라.”
<순조실록 28권, 27년 (1827년 2월 9일)>
 
 

  • 수릉에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약화시키려 노력했던 효명세자가 잠들어있다.

    수릉에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약화시키려 노력했던 효명세자가 잠들어있다.

효명세자는 1827년 2월에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다. 경세에 관한 독서를 소홀히 하지 않으며 준비된 자세로 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는 세도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동안 유능했음에도 정치에서 소외된 인재를 등용하면서 의욕적으로 권력 개편을 단행했다. 또한, 개방적인 사고방식으로 선진문물을 수용하는 데에도 긍정적이어서 실학이 선구자였던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자주 왕래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학문과 예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효명세자는 예술분야에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 순조가 즉위한 지 30년 기념 연회에서는 자신이 직접 궁중행사를 관장하고 악장과 가사를 만들기도 했다.

순조의 기대에 부응하며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다방면에서 열린 사고로 의욕적인 국정운영을 보여줬던 그의 대리청정 행보는 4년 만에 끝나게 된다. 허약한 신체 때문에 자주 의원을 찾았던 그는 1830년 5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세자의 대리청정으로 왕실의 중흥을 꾀했던 순조에겐 더없이 슬픈 일이었다. 순조 역시 4년 뒤인 1834년 세상을 떠나면서 왕위는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에게 이어지는데 이때 헌종의 나이는 8세였다. 역대 조선 임금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순조 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된다. 결국, 자신이 척결하려 했던 세도정치는 고스란히 아들의 몫으로 넘어가게 된 셈이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문조와 그의 비 신정익왕후 조씨가 함께 잠들어 있는 수릉(綏陵)은 하나의 봉분으로 조영된 단릉이다. 수릉의 안내판을 보지 않고 지나치면 얼핏 문조만을 위한 능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능으로 가까이 올라가면 봉분뿐만 아니라 혼유석 또한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만든 혼유석인데 하나 뿐이 없으니 살아생전 예술에 재주가 많고, 무용도 즐겼던 효명세자가 조금 갑갑해할 수도 있겠다. 장명등 역시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무덤 주인의 것으로 인정할 만큼 화려하고 세련되었다.

문조는 세자의 자리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죽었지만 부인 신정익왕후는 83세까지 장수하며 후일 흥선대원군과 함께 조선을 좌지우지하는 여인으로 살아간다. 남편이 이루지 못한 세도가문 척결을 부인이 일정부분 해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그 때문일까 문조와 신정익왕후가 잠든 무덤은 단릉의 형태이지만 위엄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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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가 꿈꿨던 세도정치의 타파가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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