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건원릉] 500년 조선왕조의 개국, 태조, 국내여행,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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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건원릉] 500년 조선왕조의 개국, 태조


태조 이성계,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가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라는 것쯤은 쉽게 아는 사실이다. 위화도 회군을 통해 당시 고려 실세였던 백전노장의 최영을 몰아내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리고 그가 잠들어 있는 건원릉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고려 변방의 장수에서 한 나라의 태조가 되기까지 그리고 아들 사이에 벌어진 피바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이야기를 건원릉에서 들어보자.   

                    
                

변방의 2인자에서 한 나라의 태조로

  • 이곳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시작한태조 이성계가 잠든 건원릉이다

    이곳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시작한 태조 이성계가 잠든 건원릉이다.

1335년 이성계는 지금의 북한 땅인 함경도 영흥의 관리였던 이자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났던 이성계는 잘 알려졌듯이 활 솜씨가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이성계의 활 솜씨와 관련해서는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아버지 이자춘이 세상을 떠난 이후 이성계는 동북면의 국방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1362년 홍건적과의 싸움에서는 말에 탄 상대 장수만 골라서 활로 쏴 죽이는 신공을 보였다고 한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특히 심했는데 태조실록을 통해 여러 일화를 살펴볼 수 있다. 황산대첩 당시 왜군에는 아기발도(阿只拔都, 아시누키 미야코)라는 유명한 장수가 있었다. 칼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던 아기발도를 고려군은 당해낼 수 없었고 그들이 입고 있던 갑옷은 화살촉보다 단단한 철로 제작되어 있었다. 결국, 이성계가 나서서 화살로 아기발도의 투구를 명중시켰고, 그 사이 부하 이지란이 아기발도의 머리에 화살을 명중시킨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처럼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며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만 갔다. 외적의 침입에 불안해하던 백성들에게는 희망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 힘들어하는 국민들에게 스포츠로 국위선양을 해 즐거움을 선사한 박지성 혹은 김연아 선수와 비교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신흥무인세력으로 고려 내 입지를 다졌던 이성계에게도 넘지 못할 산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고려 권문세족 출신 최영이었다. 홍산대첩 등 이성계와 함께 고려 말 외적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최영은 변방 출신의 이성계보다 늘 앞서 가고 있었다. 1인자는 누가 뭐래도 최영이었다. 위화도 회군 전까지는 말이다.

이쯤 대륙의 정세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몰아내고 한족(漢族)의 명나라로 기울고 있었다. 기세등등한 명나라는 공민왕 때 수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는 억지를 부렸고, 이에 우왕은 요동정벌을 명함으로써 맞대응을 한다. 최영은 우왕이 명을 받들어 출병을 준비하나 이성계는 반대의 뜻을 내비친다. 여기서 그 유명한 ‘4대 불가론’이 등장한다. 명나라와 같은 대국을 거스르는 것(以小逆大), 바쁜 농번기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夏月發兵), 북으로 출병한 사이 왜구가 침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擧國遠征, 倭乘其虛), 장마철로 인해 활이 녹슬고 전염병이 돌 수 있다는 것(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요동정벌의 선봉에는 최영이 아닌 이성계가 나서게 된다. 우왕이 출병 직전 자신의 신변을 위해 최영을 곁에 두었기 때문이다. 우왕의 마지막 선택은 결국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 되었고, 위화도에서 공격의 날을 돌린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단 숨의 1인자의 자리에 오른다. 

 
  • 건원릉보다 먼저 보이는 정자각은 왕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건원릉보다 먼저 보이는 정자각은 왕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죽음을 무릅쓰며 어렵게 세운 나라만큼이나 왕위를 계승하는 문제 또한 쉽게 풀지 못했다. 그 이유에는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태종 이방원이 있었다. 이방원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아버지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형제간 피를 보이는 권력 다툼을 펼쳤고 분노가 극에 달한 이성계는 결국 함흥에서 칩거하기에 이른다.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어드리기 위해 태종은 함흥으로 사신을 보내지만, 이성계의 녹슬지 않은 활 솜씨 덕분에 함흥으로 떠났던 사신들은 모두 감감무소식이었다. 그 유명한 ‘함흥차사’의 유래가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이후 무학대사의 간곡한 설득 끝에 이성계는 한양으로 돌아와 태상왕의 자리에서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몸은 비록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분노는 무덤 속에서도 아마 사그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태종 때 조성된 건원릉은 조선왕릉 제도의 표본이다. 기본적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랐으며, 봉분을 두르고 있는 병풍석은 화강암이다. 12면의 병풍석 바깥으론 난간석을 둘렀고 다시 그 난간석 바깥에는 석호와 석양을 교대로 배치해 왕릉을 지키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석물들보다도 건원릉에 들어서면 먼저 보이는 것은 정비되지 않은 듯한 풀이다. 아들의 만행에 극에 달했던 이성계의 분노처럼 무덤의 풀도 치솟은 걸까? 태조 이성계가 잠든 건원릉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능의 모습과는 다르다. 푸른 잔디가 아닌 억새가 무성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성계의 분노가 만든 것이 아니다. 태종이 고향 땅을 그리워한 아버지를 위해 이성계의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왕권 욕심 때문에 아버지께 노여움을 산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일까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효도하고자 한 태종의 마음이 엿보인다. 건원릉에서 돌아오는 길 “부모님은 기다려주시지 않는다. 살아계실 때 잘해라.” 하는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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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조선을 건국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지만
그만큼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살았던 이성계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건원릉입니다.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10월 22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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