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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지역호감도

인동에 숨어있는 유교문화의 흔적


인동이라는 지명이 있다. 현재는 구미시에 있는 인의동, 임수동, 진평동, 구평동 등을 아울러서 부르는 곳이지만, 선조가 다스릴 때는 도호부가 위치하고 고종 때는 인동군이라는 지명으로 불릴 만큼 발달한 지역이었다. 이런 과거의 역사를 추측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조선을 다스리는 기본 원리였던 유교문화의 뿌리다. 특히 서원과 향교가 둘 다 위치해있다는 점은 이곳이 본디 교육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상당한 발전 했던 지역임을 암시한다. 신라시대의 고분군을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 꾸준히 의병이 활동했던 기록, 삼일운동의 시발점이 된 고을 중 하나라는 것도 이곳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추측할 수 있는 증거이다. 

                    
                

사람을 어질게 가르치고 교화하는 두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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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변 근처에 나란히 서 있는 향교와 서원의 모습. 전통적 위치 선정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구미시 인동 지역은 조선 시대 도호부가 위치했던 고을 중 하나다. 조선에 총 75개의 도호부가 있었고 3품 이상의 도호부사가 내려와 다스렸던 곳이니 규모가 크지는 않아도 지역의 요충지로 인정 받았던 셈이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옛 인동 지역의 하나인 임수동에서는 조선시대의 유적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 중 인동향교와 동락서원은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구미대교 근방에 사이좋게 위치한 특이한 형국을 지니고 있다. 지금이야 차로 돌아보면 지역의 향교와 서원을 함께 묶어 돌아볼 수 있으니 별다른 느낌이 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서원과 향교는 자리 잡는 지형부터 다르다. 향교는 일반 백성들의 교화와 성현에 대한 제향이 기본이었기에 관아 동쪽에 4리가량 떨어져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반면 서원은 달랐다. 마을에서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자연 속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것에 중점을 쏟은 만큼 향교와는 떨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렇게 입지 자체가 다른데도 이 둘이 이웃하게 된 이유는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디 인의동 지역에 위치했던 향교가 1988년 도심이 확장되면서 동락서원 옆으로 이사 오게 된 것. 본디는 서로 다른 위치에서 선비들을 가르쳤을 두 교육기관이 이러한 사연에 의해 이웃하게 되었던 것이다. 
 

  • 400년간 그 자리를 지켜온 동락서원의 은행나무. 특히 가을에는 그 풍취가 더욱 커진다.

한때는 지역의 자부심이었을 두 명문 학교들이지만 지금은 아는 사람만 그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인동의 유학자였던 장현광과 장경우가 모셔진 동락서원은 숙종 때 동락이라는 사액을 받았지만 서원철페령으로 근 60년간 문을 닫아야만 했다. 대대적으로 사원을 보수한 것이 1971년으로 현재는 경덕사와 중정당,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창고, 문루, 제사가 열릴 때 선현이 흠향을 하러 들어오는 신문 등이 남아 있다. 한편 이곳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곳은 동락서원 앞에 있는 은행나무. 수령이 380년이 넘어가는 거목이다.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동락신나루와도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해 언제나 서원과 그 길 주변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 인동향교는 내삼문과 외삼문을 갖추고 명륜당 뒤에 대성전을 배치하는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88년에 이사 온 인동향교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다만 기존에는 대성전과 명륜당, 내삼문과 외삼문만 남아 있었던 것이 이사 오면서 학생들이 머무는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가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본디 동무와 서무도 있었지만 6.25에 소실된 이후 다시 세워지지는 못했다. 현재는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열리는 석전대제나 전통혼례 등에서 옛 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조선의 운명을 한층 비틀어놓은 흔적, 척화비

한편 인동향교에서 3km가량 떨어진 곳에는 대원군의 추상같은 목소리를 전했던 척화비가 세워져 있다. 보통 비석이 돌을 매끈하게 깎은 조형물의 형태라면 구미시에 세워진 척화비는 커다란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척화비로 대표할 수 있는 쇄국정책의 득실에 대해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을 터.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척화를 낳은 유교의 이론이었던 화이론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보고 나머지 나라들을 오랑캐로 보았던 습관이 정세를 잘못 판단하게 만들었던 것. 이는 척화비가 쓰인 시기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측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
    개아만년자손(戒我萬年子孫) 
    병인작( 丙寅作) 신미립(辛未立) 

  • 서양의 오랑캐가 침범하여
    싸우지 않고 화친을 도모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행위이다.
    만대의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척화비가 세워진 것은 신미년이던 1871년이었으되 이 글이 쓰여진 것은 병인양요가 일어난 해인 1866년이라는 점에서 이미 척화 쪽에 마음이 쏠려 있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근 10년간 진행되었던 쇄국정책은 이후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당하면서 실패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교를 따라야 할 도리로 삼되 그 전세에 따른 외교를 기본으로 삼았던 옛 선현들의 흔적을 덮어버렸다는 점에서 이 척화비는 역사 속 하나의 증표로 서있다.

현재의 것, 현대의 것만 남아있을 것 같은 구미시에도 아직까지 역사의 숨결이 전해진다니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구미를 찾을 기회가 있다면 이곳 인동 지역의 향교와 서원, 척화비 등을 두루 둘러보며 공업도시 구미가 아닌, 역사도시 구미의 모습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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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공업의 도시인 구미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림의 흔적! 색다른 지역사와 함께하면 더욱 재밌답니다. 

트래블투데이 홍성규 취재기자

발행2018년 09월 05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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