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긴 왔다. 빨강 노랑 어여쁜 색으로 단장을 마친 나뭇잎들이 살랑대며 약을 올리는 가을 말이다. 불과 3주 전만해도 기어코 올해는 꼭 주원과 단풍을 보러 가겠다고 다짐하였으나 지금은 이렇게 혼자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깍지 낀 손을 꼭 마주잡고 오르기로 하였던 단풍놀이는 어디로 갔을까.
“또 또 또! 나 실연당했어요. 자랑할 일 있어? 얼굴 좀 펴.”
친구라는 것이 자신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찍힌 셀카를 남자친구에게 전송하면서 말한다. 그러자 또 다른 친구가 한 술 더 떠 거든다.
“그래! 너 자꾸 그렇게 죽상하면 주원인지 뭔지가 알아주기나 할 것 같애? 너만 손해야. 너만.”
가뜩이나 머리도 복잡하고 마음도 복잡한데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신경을 건드린다.
“자꾸 잔소리 할 거면 너희 먼저 올라가.”
“기집애, 괜히 우리한테 화풀이지. 너 그렇게 굼벵이처럼 굴 거면 진짜 우리먼저 간다.”
매정한 것들. 친구들이라고 기분 풀어준다며 기어코 끌고나오더니 이제는 지들끼리 다닌단다.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여자는 먼저 산길을 올라가는 친구들의 발걸음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곧 비가 오겠는데? 길을 걷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그제야 혼자임이 실감이 난 여자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애들은 어디로 간 거야. 전화도 안 받고.
앗. 여자의 발목이 잠시잠깐 춤을 추듯 움직였다.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걸린 탓이다. 여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었지만 서러움의 무게가 더욱 그녀의 눈물샘을 짓눌렀다.
“괜찮으세요? 아까 보니까 발목이 삐끗한 것 같던데.”
낮은 음색의 목소리가 주원과 비슷했다. 이렇게 순간순간 주원이 떠오르는 자신이 싫었다. 도움은 고마웠지만 복잡한 심경이 더욱 컸던 여자는 귀찮다는 듯 괜찮다는 말을 하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곧 비가 내릴 거라던데. 잠시 비를 피했다 가시는 게 좋겠네요. 부축 해드릴 테니까 제 어깨 잡으세요.”
“괜찮아요. 그까짓 비.”
여자는 상냥하게 말하는 남자에게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소나기처럼 제법 쌀쌀하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괜찮다니까요. 정말!”
여자는 신경질적인 표정과 말투로 남자를 다시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때 한 두 방울 빗방울이 여자의 이마에 톡톡하고 떨어지더니 이내 굵은 빗줄기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남자는 거보라며 여자의 신경질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부축해 굴 안으로 몸을 피했다.
“제법 굵은 비가 오네요. 마치 장맛비처럼.”
“…”
“혼자 온 거에요? 저기 연리지 나무 봤어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보면 영원히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도와준 건 고마운데요. 이렇게 다리를 삐끗했는데도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연리지 나무가 무슨 소용 있겠어요? 정말 짜증나게.”
여자는 남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으나 늘 주원에게 투정을 부리던 것처럼 남자에게 짜증을 늘어놓았다. 왠지 이 남자라면 주원처럼 그녀의 짜증을 받아줄 것 같았다.
“다리는 좀 괜찮아요?”
“네, 덕분에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괜히 짜증 부려서 미안하고요.”
“비가 금방 그칠 것 같네요. 금세 하늘이 맑아졌어요. 많이 힘든 것 같은데 비는 이렇게 금방 그쳐요. 그리고 다시 맑은 하늘과 바람과 햇살이 비추죠. 그쪽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다른 때 같았으면 웬 오지랖이냐며 속으로 한바탕 욕을 했겠지만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빗방울이 점점 얇아지며 먹구름이 가신 자리에는 한 그루의 예쁜 연리지 나무가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