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가 한입 베어 물고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던 독사과. 세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녀가 또 모르는 사람이 내민 사과를 덥석 받아 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빛깔이 좋았던 것일까 향이 치명적으로 달콤하였을까? 마녀가 백설공주에게 사과를 내민 것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주었던 것처럼. 그래서 다들 사과를 할 때 손을 내민다고 하나. 손을 내밀면 아니 사과를 하면 받아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승희는 딸에게 명작동화 백설공주를 읽어주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딸아이가 그 다음 이야기를 말해달라고 보채지 않았다면 그녀의 머릿속은 수만 가지 질문들로 가득 채워졌을지도 모른다.
승희는 정신없이 떠올리던 생각들을 더듬어보았다. 사과를 내민다. 사과를 받아준다. 그것이 백설공주의 목숨을 앗아갈 뻔할 만큼 치명적이든 아니든. 사과하고 싶은 사람에게 정말 사과를 내밀면 사과를 받는 사람도 문득 이런 생각을 하며 받아줄 수 있을까? 유치하다.
삼 년 전 승희와 다툰 그녀의 친구 A와의 일이 떠오른다. 전혀 관계없는 세계 명작 백설 공주를 읽으면서 왜 A가 떠오른 걸까. 그녀와 A는 쌍둥이처럼 생각이 잘 맞곤 했다. 그래서 대학 캠퍼스 시절엔 늘 A와의 추억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들이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기로 다짐하던 그 순간, 4년간의 우정이 모래성이 쓰러지듯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하지 말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승희는 A에게 못된 말을 쏟아 부었고 A도 울부짖으며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것이라며 관계를 끝내버렸다.
둘은 울고 있었고 서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물밀 듯이 몰아쳐 오면서 폭풍우처럼 상대방의 가슴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후 승희는 결혼을 했고 귀여운 아이도 낳았다. 간간히 또 다른 친구를 통해 A의 소식을 들었으나 관심 없는 척 했다. A도 승희의 소식을 들었겠지만 감감무소식인걸 보니 그녀의 마음도 아직 인가 보다.
딸아이가 자꾸만 보챘다. 이번엔 밖에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복잡한 생각들을 했던 승희는 몸이 천근만근이라 나가기 싫었지만 딸아이는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승희는 하는 수없이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볼 심산이었다.
“엄마! 사과다 사과. 오늘 우리가 책에서 읽었지? 사과!”
목요일이었지. 오늘은 우리 동네 장이 열리는 날이다. 딸아이는 그새 과일을 파는 곳을 본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신이 나서 과일아저씨가 하는 말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아주 달고 맛있는 장수 사과입니다. 당도가 높고 몸에 좋은 장수사과입니다.”
승희는 순간 사과를 보내면 A가 받아줄까요? 라는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질 뻔했다. 순간 얼굴이 달아오른 승희는 사과 한 박스를 주문하는 걸로 질문을 대신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사각사각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아까 시식용 사과를 집어 들더니 여전히 사각사각 잘도 베어 먹는다.
누군가에겐 큰 상처가 될 만한 일을 그런 유치한 사과를 보낸다고 해서 받아줄 수 있을까?
나 같으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받아줄 수 있을까?
사과를 보내본다.
빛깔 좋고 치명적인 달콤한 향이 나는 사과를 받아든 A. 상처가 아물지 않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백설공주처럼 한 입 베어 물어본다.